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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에 입사하고 한글날 결혼한 ‘한글 운명’

“뭐야? 너도 10월 8일이야?” 우리 과 동기 중에 가장 친한 상현이 녀석이 하필 나랑 같은 날 결혼식 날짜를 잡았다. 길일이니 사주팔자니 따지기 좋아하는 어머니가 잡은 날짜인데 하필 절친한 친구 녀석과 같은 날이라니…. 10월 8일은 토요일,...

“뭐야? 너도 10월 8일이야?”
우리 과 동기 중에 가장 친한 상현이 녀석이 하필 나랑 같은 날 결혼식 날짜를 잡았다. 길일이니 사주팔자니 따지기 좋아하는 어머니가 잡은 날짜인데 하필 절친한 친구 녀석과 같은 날이라니…. 10월 8일은 토요일, 10월 9일은 일요일이었다. 나는 어머니께 결혼식 날짜를 하루 미뤄 10월 9일에 해도 되겠냐고 물었다. 다행히 어머니는 10월 9일도 길일이라 괜찮다고 하셨다. 사실 나는 한글날이라 더 좋았다. 30년 가까운 세월이 흘렀다. 이렇게 나의 결혼기념일은 한글날이 되었다.

지난 3월 10일 한글학회, 한글문화연대, 한국어문기자협회와 한국기자협회 관계자들이 모여 ‘로마자 약칭 대응 방안’을 마련하기 위한 첫 모임을 가졌다. 각 단체 대표자들 간의 점심 식사 자리였는데 우리 말글에 대한 가벼운 이야기를 나누다가 “저는 한글날 결혼했고 한겨레신문에 입사했으니 한글과 인연이 깊다.”고 말했다. 아마도 그 말이 계기가 돼 이렇게 한글학회의 『한글새소식』에 글을 쓸 수 있는 영광을 얻은 것 같다.

내가 몸담고 있는 한겨레신문은 1988년 5월 15일 창간 때부터 순 한글 가로쓰기를 선보였다. 당시만 해도 모든 신문은 한자투성이였다. 게다가 한결같이 세로쓰기 편집이라 위에서 아래로 읽어 내려가기가 여간 불편하지 않았다. 한겨레신문의 표기 준칙은 매우 독특하다. 가장 눈에 띄는 것은 영문자 따위 외국 문자를 괄호 안에 처리하는 것이다. 예를 들어 엘지(LG), 에스케이(SK), 케이티앤지(KT&G) 따위로 표기한다. 특히 스포츠부 기사의 경우 이런 표기가 많이 등장한다.

외래어는 우리말로 바꾸려고 노력한다. ‘월드베이스볼클래식’을 ‘세계야구클래식’, ‘아시안게임’을 ‘아시아경기대회’ 따위로 바꿔 썼다. 경기 용어인 ‘스틸’은 ‘가로채기’, ‘리바운드’는 ‘튄공잡기’ 따위로 쓴다. 또 한자어는 되도록 순우리말로 바꿔 쓰려고 한다. ‘국가’는 ‘나라’, ‘작년’은 ‘지난해’, ‘이 중에서’는 ‘이 가운데’, ‘항상’은 ‘언제나’, ‘허위’는 ‘거짓’, ‘양국’은 ‘두 나라’, ‘~에 의해’는 ‘~에 따라’, ‘~에 달한다’는 ‘~에 이른다’ 따위가 그것이다. 나는 후배 기자들의 기사를 손질할 때나 기자협회장으로서 협회 직원들의 글을 다듬을 때 습관적으로 어려운 한자어나 외래어를 쉬운 우리말로 고치려고 손을 댄다.

2019년 12월, 한국기자협회 제47대 회장에 당선된 뒤 회장 명패와 결재 도장을 한글로 제작하라고 주문했다. 도장은 ‘동훈’으로 새겨져 있다. 어린이 도장처럼 귀여움마저 느껴진다. 사실 우리는 이 땅에 태어나면서부터 한글을 만났고 한국말을 들었고 옹알이를 끝내면서 한국어로 말했고, 글을 배우면서 한글을 썼다. 한반도에서 태어난 운명이기에 우리글과 우리말을 자연스럽게 익히고 썼다.

우리 말글이 너무나 아름다운 언어, 우수한 문자라는 것을 알게 된 것은 훈민정음이 과학적인 문자이고 우리는 자국어를 갖고 있는 몇 안 되는 민족이라는 교과서적 이론만으로 배운 게 아니다. 역설적이게도 학창 시절 다른 나라 언어를 배우면서 우리 말글과 자연스럽게 비교되었고, 그때부터 우리 말글이 우수하다는 것을 깨닫기 시작했다.

고교 시절 아버지는 늘 상대에 진학하길 바라셨고, 우리 집 삼형제는 모두 상대(경제학과, 무역학과, 경영학과) 출신이 됐다. 사실 나는 국문학과에 진학하고 싶었다. 국어 점수는 언제나 만점 또는 만점에 가까웠다. 나는 학창 시절 언젠가부터 우리 말과 글의 매력에 퐁당 빠져들었다. 어떻게 자음과 모음이 그리고 받침의 조화로움이 하나의 글자가 되고, 글자가 모여 하나의 단어가 되고, 단어가 모여 하나의 문장이 되며 서로 의사를 소통할 수 있게 됐을까? 어떻게 이런 그림같이 아름다운 균형을 갖춘 문자가 소리가 되어 나오고 대화를 가능하게 했을까? 우리말에는 미묘한 감정을 그대로 표현할 수 있는 세세함이 있다. 외국인들이 한국어를 배울 때 가장 어려워하는 부분이기도 하지만 그만큼 풍부한 감정을 담아낼 수 있어 표현의 아름다움을 더한다.

케이팝 등의 영향이기도 하겠지만 최근 언론 보도에 따르면 지난해 한국어반을 운영하는 해외 초·중학교가 43개 나라 1928곳에 이르렀다고 한다. 특히 프랑스에서는 한국어반이 50여 개가 넘게 운영되고 있으며 한국학을 종합학과로 운영하는 대학의 경쟁률이 20대 1을 넘어서고 있다고 한다.

말과 글은 기록을 남긴다. 세계 많은 나라에는 입으로 전해지는 이야기들이 있다. 그런데 오랜 세월 동안 사람과 사람을 거치면서, 그리고 개인의 견해에 따라 달리 해석을 하면서 애초 내용과는 전혀 다르게 변하기 일쑤다. 그러나 글로 쓰고 음성이나 영상을 녹화해 보관하게 되면 그 내용은 반영구적으로 우리들 곁에 남게 된다. 물론 기록에는 진실이 담겨 있어야 한다. 거짓 정보는 혼란과 분열을 초래하기 때문이다. 그런 면에서 지금의 역사를 기록하고 있는 기자들의 사실 확인 노력 과정은 매우 중요하다.

나는 우리 말글이 그냥 좋다. 요즘 외국인들이 한글이 새겨진 옷을 입고 다니는 것을 보면 뿌듯함을 느낀다. 어머니의 반대로 좌절됐지만 나는 결혼 전부터 미래의 아이들 이름을 순우리말로 ‘한얼’, ‘한결’, ‘한별’로 미리 지어놓았었다. ‘한결’이라는 이름은 후배가 가져가 그의 아들 이름이 되었다. 아이들의 이름을 순우리말로 못 지은 것이 못내 아쉽다. 우리의 말과 글을 아름답게 사용해 아름답고 조화로운 사회를 만들어 갈 수 있기를 기대해 본다.




김동훈

김동훈

한국기자협회 회장, 한겨레신문 기자

cano@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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