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낙서로 말하자 낙서로 답했다

근래 부녀자들이 경쟁하는 것 중 소설이 있는데 비녀나 팔찌를 팔거나 빚을 내면서까지 다투어 빌려 그것으로 긴 해를 보냈다. 채제공(1720∼1799)의 『번암집』 가운데 「여사서(女四書)」의 서문에서 부녀자들이 비녀나 팔찌를 팔...

근래 부녀자들이 경쟁하는 것 중 소설이 있는데 비녀나 팔찌를 팔거나 빚을 내면서까지 다투어 빌려 그것으로 긴 해를 보냈다.

채제공(1720∼1799)의 『번암집』 가운데 「여사서(女四書)」의 서문에서

부녀자들이 비녀나 팔찌를 팔고 빚을 내면서까지 소설을 보던 시대가 있었다?
그런데 누구에게서 소설을 빌려갔다는 말인가.

18세기 서울에는 처음보는 가게가 생긴다.
‘쾌가(儈家)’라고 하는 세책점( 베껴 쓴 책을 돈을 받고 빌려주는 가게)이 생긴 것.

조선의 종이는 품질이 좋아 중국 지식인들에게도 인기가 높았으나 대량생산이 어려웠기에 귀하고 비쌌다. (명나라의 문인 도륭(屠隆, 1543~1605)이 편찬한 것으로 전하는 <고반여사(考槃餘事)>에 따르면 고려의 종이는 ‘비단처럼 희고 질기며 글씨를 쓰면 발묵(發墨)이 아주 좋으니 이는 중국에서는 없는 것으로 기이한 물건’이라고 쓴 바 있다.)

더군다나 책은 구하기도 쉽지 않던 시절이어서 중종 때 지방의 유생들은 책이 없어서 읽지 못하고 값이 비싸 사지 못하여 학문에 애로사항이 많다고 하소연을 할 정도였다.(『중종실록』 중종 24년(1529) 5월 25일)

양반들도 책을 구하려면 책을 가지고 전국을 누비며 판매하는 전문 도서 중개업자인 ‘책쾌(冊儈)’들을 통해야 했다. 이곳저곳 독자를 찾아다니며 책을 판매하던 ‘책쾌’들은 책을 찾는 이들이 많아지자 유명한 소설책들을 그대로 베껴 필사본을 만들고 그것을 사람들에게 돈을 받고 대여해주는 세책업을 시작했다. 책을 판매했던 ‘책쾌’의 경험이 상업경제의 발달과 시대적 요구가 맞물려 세책업으로 발전하게 된 것이다.

‘쾌가(儈家)’라고 불렸던 세책점에는 양반부터 천민까지 누구나 드나들었고 그 중에서도 사대부 여성 고객층이 특히나 많았다. 세책은 담보를 맡기고 책을 빌린 후 돌려줄 때 책값의 1/10 정도를 대여료로 냈다. 담보 물품은 놋주발, 담요 같은 생활 용품이나 은비녀, 팔찌 같은 장신구 등이었다. 세책점은 ‘부녀자들이 시간가는 줄 모르고 (소설을) 마음에 새겨가며 몰래 읽어댄다’거나, ‘부녀자들이 책을 빌려보느라 가산을 탕진 한다’는 말이 날 정도로 인기가 많았다.


세책점에서는 『삼국지』, 『수호지』 등 중국 소설의 한글 번역본은 물론 『홍길동전』, 『구운몽』, 『춘향전』 등 창작 한글 소설들을 주로 취급했으며 당시 가장 인기 있었던 『춘향전』은 세책점마다 이야기가 조금씩 다르기도 했다.

점주는 독자를 매료시킬 작품의 가치를 보는 안목과 유행을 읽는 감각이 필요했고 그러한 세책점은 단연 인기가 있었다. 또한 책을 빌려가는 수량에 따라 돈을 지불했기 때문에 한 권짜리 작품을 여러 권으로 나눠 필사했고 결정적인 장면에 이르렀을 때 다음 권으로 넘겨 독자가 다음 책을 빌려가도록 하는 상술을 발휘했다. 이에 불만을 품은 독자들은 책 속 여백에 불만을 적었는데….

낙서에 담은 내 마음, 댓글과 대댓글


“책 주인은 보오. 이놈아, 네가 책을 세 주고 하는 것이 무엇이냐. 책 세를 너무 과하게 받는구나.” “한 권인 것을 네 권으로 만들고 남의 재물만 탐하니 그런 잡놈이 또 어디 있느냐.” 『김홍전』의 독자

“한 권으로는 너무 많은 고로 부득이 이십여 장씩 두 권으로 묶었으나 세전을 더 받고자 함이 아니니 보는 이는 허물치 마시오.”

《만언사》의 책주인

점주가 책의 회전율을 높여 대여료를 최대한 많이 받기 위해 책의 권수를 늘리자 (한 권에 30장, 1면에 10행 내외, 한 행 당 18자 내외의 글) 독자들은 불만을 책의 여백에 남겼고 책 주인은 해명을 하는 답글을 역시 책에 쓴 것이다.

세책점의 책은 여러 사람들이 돌려보는 책이다 보니 파손을 최소화하기 위해 튼튼하게 만들었다.
  1. 책 표지는 삼베로 싸서 최대한 두껍게 하였고
  2. 책장은 들기름을 발라 빳빳하게 만들었으며
  3. 책장 넘기는 부분은 글자를 비워 침에 의해 글자가 지워지지 않게 하였고
  4. 각 장의 위쪽에 쪽수를 표기해 찢겨나간 부위를 쉽게 확인할 수 있게 하였으며
  5. 책의 마지막 장에 ‘부탁의 말’을 넣기도 했다.

    “악필로 썼으니 양반님네들은 글씨 흉을 보시지 마시고 글씨 잘못 쓴 죄를 용서…”


그러나 세책점 주인의 이러한 노력에도 책의 훼손은 피할 수 없었고 낙서도 상당한 골칫거리였다.

“책 주인 보소. 이 책은 재미는 있으나 낙서가 너무 많아 보기가 어려우니 보수 좀 해 주소.”
“임경삼(세책점 주인 실명)아, 내용을 고치라고 몇 번을 말했느냐.”
“이 책이 삼국지라 칭하나 삼국지가 아니라 망국지라.” (『삼국지』의 독자)
“여몽, 때려 죽일 놈.” (『삼국지』에서 관우가 여몽에게 허무하게 죽는 대목에서)

세책본에 남겨진 낙서는 세책 내용에 대한 비난, 유행가 가사, 시대 상황에 대한 자신의 소회, 세책점 정보, 책 속 주인공의 모습을 상상해서 그려 넣은 것과 세책점 주인에 대한 인격 모독성 글과 심한 욕설, 음화 등 인기 있는 책일수록 그 낙서와 훼손도 심했다.

이러한 낙서에 대한 세책점 주인의 고충은 다시 낙서로 대답하는 글에서 잘 드러난다.

"말이 비록 허무맹랑하나 또한 장난으로 보기에는 우스운 말이 많으니, 착실히 보시고 부디 낙장은 마옵소서." "이 세책 보는 사람은 곱게 보고 책에다 칙칙하게 글씨를 쓰지 마시고 그 무식하게 욕설을 기록하지 마시기를 천만 번 바랍니다." "이 책에다가 욕설을 쓰거나 잡설을 쓰는 폐단이 있으면 벌금을 낼 것이니, 이후로 깨끗이 보시고 보내 주소서."

세책점 주인의 말

낙서는 구석기시대부터 조금의 여백만 있어도 끄적여 왔던 인류 문화사의 한 모습이다. 세책본 속 낙서는 입에서 나오는 말을 그대로 적을 수 있는 한글이 있었기에 다양한 표현이 가능했다. 입으로는 ‘뒤죽박죽’이라 말하면서 글을 쓸 때는 ‘착종(錯綜)’이라는 한자(뜻글자)를 사용했던 당시 지배층과는 달리, 입에서 나오는 말소리를 그대로 (욕설까지) 적을 수 있고 느끼는 감정을 말하는 단어 그대로 써 내려 갈 수 있는 쉬운 글자, 한글(소리글자)을 사용했기 때문이다.

세책업은 책을 돈벌이 대상으로 보지 않았던 당시의 사고방식에 대한 대안이자 소설 유통의 경로였다. 세책점은 한글을 읽을 수 있는 사람은 누구나 고객이 되었으며 한글소설 대중화에 기여했다는 점에서 한글 발달사의 한 축을 담당한다.

국내외에 보존되어 있는 세책본 소설은 일본 《동양문고》에서 조선시대 세책본을 가장 많이 소장하고 있으며 모두 31종 334책의 세책본을 보유하고 있다. 국내에는 이화여대에 9종, 서울대와 연세대에 7종 씩 있고 1500여 개의 낙서가 있다.

세책점은 서울(한양)에만 존재했는데 이는 책을 빌려볼 수 있는 인구 규모와 관련이 있다. 서울의 인구 규모와 관련하여 강명관의 『조선의 뒷골목 풍경』에서는 1800년 정조 24년, 서울(한양)의 인구가 20~30만은 되었을 것으로 추정한다. 제2의 도시라고 할 수 있는 평양은 4~5만, 제3의 도시라고 할 수 있는 개성은 4만 명 미만이었으니 한양을 제외한 도시에서의 세책업은 운영이 어려웠을 것이다.

세책 문화는 정도의 차이는 있지만 상업경제가 발달하고 소설 위주의 독서 문화가 형성되면서 18∼19세기에 중국과, 일본, 유럽과 미국 등에서도 나타난 동서양 공통의 보편적인 문화 현상이었다.

한글 발달 밖 세계사: 널리 이로운 인쇄술


현존하는 세계 최초의 목판 인쇄물 (≪무구정광대다라니경≫, 705년)과 금속 활판 인쇄물 (≪직지심체요절≫,1377년)로 볼 때 한국은 세계 최고의 인쇄술을 가지고 있었다. 인쇄물의 발견 연도가 이러하므로 적어도 발명은 그보다는 앞섰을 것이다.

그러나 조선시대의 책 보급은 국가 이념을 전파하는 공공적 성격이 강해 국가 주도로 책을 출판하였고, 이를 중앙관청이나 지방관청에 보급하여 신하들에게 하사했다. 개인의 서적판매는 제한되었으며 지방의 서원·사찰과 특권층에 있는 개인, 민간인들이 책을 만들어 각계각층의 수요를 충당했다. 판매용 서적의 생산은 19세기가 되어 시장경제가 발달하고 책을 향유할 만한 독자층이 성장하게 되면서 인쇄된 책도 유통되기 시작했다.

반면 유럽사회는 1440년대에 구텐베르크가 금속 활판 인쇄술을 발명하고 종이와 인쇄기 등의 기술을 결합하여 대량의 책을 인쇄할 수 있는 시스템을 구축함으로써 정보의 대폭발과 함께 폭넓은 식자층의 시대를 열었다.

1450년부터 1500년까지 반세기에 걸쳐 유럽 사회에는 8백만 권에 달하는 서적이 쏟아졌으며, (1500년 이전에는 2천만 권의 책이 인쇄되었고, 다음 100년 동안은 1억 4천만 권이 넘는 책이 인쇄되었다는 통계도 있다) 스스로 정보를 해석하고 기존의 견해에 도전하는 사람들이 늘면서 중세에서 근대로 이행하는 르네상스, 종교개혁, 과학 혁명 등 근대 사회의 탄생에 밑거름이 됐다.





차민아

차민아 / Cha Mina

한글닷컴(Haangle.com) 대표, 연구위원

댓글 1개

  1. '낙서'라는 사소한 일에서 큰 역사적 재미를 발견합니다. 유쾌한 한글 생각이네요. ㅎㅎ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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