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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학 공부, 훈민정음의 바탕이 되다

수학은 내 정치와 학문의 바탕 어렸을 때부터 책을 좋아하다 보니 저절로 학문의 세계에 빠져들었고 나는 거의 모든 학문을 두루 섭렵하게 되었다. 임금이 되지 않았다면 아마도 학자가 되어 성균관에서 젊은이들을 가르치거나 풍광 좋은 곳에서 ...

수학은 내 정치와 학문의 바탕

어렸을 때부터 책을 좋아하다 보니 저절로 학문의 세계에 빠져들었고 나는 거의 모든 학문을 두루 섭렵하게 되었다. 임금이 되지 않았다면 아마도 학자가 되어 성균관에서 젊은이들을 가르치거나 풍광 좋은 곳에서 서원을 열어 인재들을 키웠을 것이다. 물론 임금이 되었다고 학문을 게을리한 것은 아니었다. 오히려 당대 최고 학자들을 두루 가까이하니 학자로서의 탐구와 삶은 더욱 풍요해졌다. 특히 집현전에서 신하들과 옛 책을 함께 읽고 토론하는 일은 가장 즐거운 일과였다.

모든 학문이 다 소중하지만 그중 내가 더욱 아끼는 학문은 수학이다. 산수라고 해도 좋다. 수학은 천문학의 바탕이고 나라를 다스리는 일의 바탕이었다. 사대부들은 눈치채지 못했지만, 사실 훈민정음도 수학이 바탕이 되었다. 훈민정음은 점과 직선만으로 이루어졌는데 그게 도형 수학인 기하학이라는 것이다. 자음과 모음을 결합하는 원리는 서양에서는 21세기나 꽃피게 되는 위상수학이라는 것이다.(김슬옹, ≪세종학과 융합인문학≫(보고사) 참조.)

▲ 초성자와 중성자 합자에 반영된 위상수학 원리 (김슬옹, ≪세종학과 융합인문학≫) © 세종신문

〈산학계몽〉을 배우다

어린 시절에는 주로 동양의 고전과 역사, 음운, 소리에 관심을 두고 공부했으나 임금이 된 다음에는 천문학과 수학에도 열중했다. 특히 수학은, 농지측량제도인 양전(量田)의 문란이 고려가 망한 원인 중 하나가 된 것을 깨닫고 산학은 국가행정에 큰 영향을 미치는 것을 생각해서 나 스스로도 배우고 신하들에게도 널리 익히게 하였다.

내가 수학에 몰두하고 장려하게 된 결정적인 사건이 있었다. 임금 자리에 오른 지 5년이 안 된 때였던 1422년 1월 1일이었다. 아버지 상왕 태종이 섭정하던 때라서 국가 제례에 더욱 신경을 썼다. 새해 첫날 해가리기를 맞이하여 제례를 지내기 위해 모든 신하들과 더불어 경건한 의식을 준비하고 있었는데 계산은 어긋났다. 내 권위와 조선의 권위가 한꺼번에 무너졌다. 해가리기가 무려 15분 늦게 일어났던 것이다. 사실 그 누구의 잘못도 아니었다.

중국에서 만든 천문 역법서를 들여다 사용하니 오차가 생길 수밖에 없다는 것을 알았지만 누군가는 벌을 받아야 했다. 이때 나는 천문학과 더불어 수학의 중요성을 절감하게 되었다.

▲ 자음 기본 17자에 적용된 유클리드 대칭 기하학(김슬옹, ≪세종학과 융합인문학≫) © 세종신문

1431년 나는 큰 결심하게 된다. 봄꽃들이 흐드러지게 피려는 3월 2일이었다. 천문 역법을 제대로 아는 인재를 키우고자 결심했고, 어전 회의를 열었다. 공조판서 정초에게 나는 이렇게 말했다.

역서(曆書, 천문학 책)란 지극히 섬세한 것이어서 일상생활에 쓰는 일들이 빠짐없이 갖추어 기재되어 있되, 다만 해가리기(일식)와 달가리기(월식)의 경위만은 상세히 알 길이 없소. 그러나 이는 옛사람들도 역시 몰랐던 모양이니, 우리나라는 비록 이에 정통하지 못하더라도 무방하긴 하나, 다만 우리나라는 예로부터 문헌(文獻)의 나라로 일컬어 왔는데, 지난 경자년에 성산군(星山君) 이직(李稷)이 역법(曆法)의 교정을 건의한 지 이미 12년이 되었거니와, 만약 정밀 정확하게 교정하지 못하여 후인들의 비웃음을 사게 된다면 하지 않는 것만도 못할 것이니, 마땅히 심력을 다하여 정밀히 교정해야 될 것이오. 우리나라 사람으로서 산수에 밝아서 방원법(方圓法)을 상세하게 아는 자가 드물 것이니, 내가 문자(한자)를 해득하고 한음에 통한 자를 택하여 중국으로 보내어 산법을 습득케 하려고 하는데 어떠하오?《세종실록》, 세종 13/1431/3/2

공조판서가 내말이 옳다고 머리를 조아렸다. 다른 신하들에게도 이렇게 당부했다.

산법(算法)이란 유독 역법에만 쓰는 것이 아니다. 만약 병력을 동원한다든가 토지를 측량하는 일이 있다면, 산법 없이는 달리 구할 방도가 없으니 수학 인재를 추천하시오._세종 13/1431/3/2)”

이렇게 하여 김한, 김자안을 유학생으로 뽑아 명나라로 보냈다. 이들을 보내기 전 나 자신이 산학계몽을 배우기로 했다. 1430년(세종 12년) 10월 23일 나는 부제학 정인지 대감으로부터 산학계몽을 배우며 나는 이렇게 말했다.

산수를 배우는 것이 임금에게는 필요가 없을 듯하나, 이것도 성인이 제정한 것이므로 나는 이것을 알고자 하오.

>산학계몽<은 원나라 주세걸이 저술한 수학책으로 곱셈이나 나눗셈 등 가장 기본적인 수학 개념이 서술돼 있다. 세금을 관리해야 했던 조선 시대 호조 관리들이 배워야 했던 필수 과목이었다. 양휘산법은 방정식 해법에 관한 것이다.

1438년에 제정한 기술 분야의 잡과십학(雜科十學)에는 산학이 포함되도록 했고, 이와 관련된 교과 중에서 〈상명산법〉·〈양휘산법〉·〈산학계몽〉은 법전인 〈경국대전〉에 포함했다. 또 산법교정소(算法校正所), 역산소(曆算所) 등을 설치하여 산학을 장려했다. 아들인 세조 때에는 산학제도를 더욱 정비하고 산학교수(算學敎授) 등의 관직을 〈경국대전〉에 반영시켰다 하니 여간 다행히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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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 글은 저작자(박재택,김슬옹) 동의로 공유합니다.





세종

훈민정음은 백성들과 함께 /세종

한글 집현전(Editors)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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