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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극로 선생 탄신 130돌, 독일 최초 조선어 강좌 100돌에 부쳐

1. 이극로 선생이 서쪽으로 간 까닭은? 130년 전 경남 의령의 농가에서 태어난 이극로선생은 지게를 지고 꼴을 베며 농사꾼으로 유년기를 보냈다. 비록 가난했어도 독학을 하며 원대한 ‘꿈’을 품었다. 마을 갓등산 정상에 올라 도연명의 “산밖에 ...

1. 이극로 선생이 서쪽으로 간 까닭은?

130년 전 경남 의령의 농가에서 태어난 이극로선생은 지게를 지고 꼴을 베며 농사꾼으로 유년기를 보냈다. 비록 가난했어도 독학을 하며 원대한 ‘꿈’을 품었다. 마을 갓등산 정상에 올라 도연명의 “산밖에 산이 있어 다함이 없고, 길 가운데 길이 있어 끝이 없구나” 시구를 외고 사방을 둘러보며 바깥세상을 궁금해 했다. 선생의 소년 시절 꿈은 ‘방랑자’ 였고, 궁금증은 가출로 이어졌다. 국운이 기울자 “올바른 뜻을 세우면 마침내 이루어진다(유지경성)” 는 사자성어를 새기며 비장한 각오로 집을 나서서 최북단 국경의 압록강을 건넜다.

1912년 서간도 회인현의 민족학교 동창학교에 머물며 처음 맡았던 아르바이트는 박은식의 책 등사였다. 박은식은 미래의 주역이 될 청소년들에게 조국 독립의 꿈과 희망을 간직하도록 고대사 저서를 집필 했다. 그는 국혼을 살리려면 무엇보다 ‘우리 역사’를 바로 알아야 한다고 주장하고 민족교육을 강조했던 인물이며, 훗날 임시정부 2대 대통령이 되었다. 

선생은 민족주의 역사가 신채호를 비롯해 주시경의 제자 김 진, 민족종교 지도자 윤세복을 만나 민족의식을 키웠고 ‘독립 운동에 일생을 바쳐 지도자가 될 것’을 다짐했다. 일제는 동창학교의 설립 직후부터 교원들의 일거수일투족을 감시하는 데 혈안이 되어 있었으며, 폐교를 감행했다.

선생은 독립군 양성과 훈련이 주된 목적이었던 무송현 백산학교에서 다시 교편을 잡던 중 마적에게 붙잡혔다가 구사일생으로 살아난 뒤 중국 상하이로 건너가 1916년 동제대학에 입학해 1920년에 졸업했다. 이동휘가 러시아 모스크바에 레닌을 만나러 갈 때 수행원으로 동행했고, 그 길로 독일 프리드리히 빌헬름 대학(지금의 훔볼트 대학)에 입학해 1922년부터 1927년까지 경제학을 전공했다. 고학생으로서 생활은 비참해 흑빵으로 끼니를 때우고 때론 굶으면서 버텼다. 어려운 여건 속에서 박사학위를 받았고 여세를 몰아 일제를 규탄하는 저서를 출판해 유럽에 널리 배포했다.

2. 독일 최초 조선어 강좌 100돌을 잊지 말자!

선생의 유학 시절 중 가장 주목되는 행적은 1923년 10월 독일 최초로 모교 동양어학과에 조선어 강좌를 개설해 그해 겨울학기부터 1926년까지 유럽인들에게 한국어를 가르친 이력이다.

개설된 38개 외국어 강좌 중 아시아 언어로 단연 중국어의 관심이 높았다. 선생은 조선어의 중요성을 알리는 데 고군분투했고, 독일, 네덜란드, 프랑스, 러시아인이 수강했다. 대학 측에서는 “코루 리(이극로) 씨는 시간을 엄수했고 또한 유능하여 큰 성공 속에 그 교수 활동을 이끌어 갔다는 점을 기꺼이 확인해 드리는 바입니다”라고 호평했다.

선생에게 ‘말글 통일과 민족 단결’이라는 큰 화두를 주었던 독일 은사는 인류학자 리하르트 투른발트 였다. 그는 “민족의 본질은 첫째 ‘어학의 통일’로 동일한 문화생활을 해온 그 배경으로 된 것인 까닭에, 민족 단결이란 무엇보다 강하다”라고 조언했다. 프랑스 유학생 공탁도 “한글 운동은 민족의 혼을 되찾고 동포들의 정신통일과 민심을 귀일시키는 것”이라 말하며 한글 운동을 독려했다.

선생은 파리에서 음성학 연구를 마치고서 영국 각지와 아일랜드를 시찰했다. 1928년 6월 6일 더블린에서 교육 현황을 조사하다가 아일랜드인들이 영어를 공용어로 사용하고 간판과 도로표식이 영어로 표기된 것을 보고 ‘우리말과 글도 저런 신세가 되지 않겠는가’라며 탄식했고 대오 각성하는 계기가 되었다. 마침내 한글 운동가로 거듭나 고국 땅을 밟았고 생을 마치는 날까지 오직 한글 운동을 일념으로 매진했다.

‘한 알의 밀알’로서 선생의 노력은 결코 헛되지 않아서 100년이 흐른 지금 유럽에서 앞 다투어 한국어를 배우려 한다. 한국학과가 신설되고 있으며, 한국어 강좌가 개설되고 “글로벌 언어”라는 별칭을 얻을 정도로 인기리에 수강생이 급증하고 있다는 소식이 들린다.
다만 한류의 화려한 이면에 우리 사회는 인문학의 위기이자 혼백의 균형이 아닌 혼(정신)을 뒤로하고 너도나도 백(물질)을 좇는 현실이며, 만연한 사대주의와 도덕적 해이의 고해에서 많은 이들이 희망을 잃고 표류하는 형국이다.

“말은 민족의 정신이요 글은 민족의 생명”이라고 강변했던 선생은 갈림길에서 방황하는 청년을 향해 “먼저 뜻을 세워야 된다. 성공은 큰 포부와 굳은 뜻에 달려 있고, 성공한 사람은 큰 포부와 경륜을 세우고 굳은 뜻으로 자신이 있게 앞만 보고 나아가는것”이라고 말했다.

선생의 뜻 세움과 방랑은 우리 말글 수호와 애국 애족 실천의 종착지로 마쳤다. 자주독립국가 건설을 염원하며 조선건민회를 창단하기도 했으나, 북녘 땅에서 만 84세의 나이로 눈을 감고 말았다. 국내외 공헌과 남긴 사상만으로도 기념하고 전승될 의의는 충분하다.

아무쪼록 독자 모두가 모국어와 글로써 국혼을 되찾고 뜻의 깃발을 바로 세워 밝은 미래를 향해 한계단 오르는 기념일이 되기를 바란다.

▲ 이극로, 독일 유학기 대일 규탄 저술 및 박사 논문(필자 소장).





조준희

조준희

『이극로 전집』 편자

sintuitio@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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