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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글과 우리 “문화광” 현판 이야기

지난 10월 15일 오후 4시쯤이었다. 친지와 광화문 네거리에서 헤어지고, 전철을 타러 경복궁역으로 올라가고 있었다. 세종문화회관 앞을 지나가려다, 세종대왕을 뵙고 가려고 길을 틀었다. 김영원 명장이 빚고 부어 만든 인자한 세종대왕의 얼굴을 뵈...

지난 10월 15일 오후 4시쯤이었다. 친지와 광화문 네거리에서 헤어지고, 전철을 타러 경복궁역으로 올라가고 있었다. 세종문화회관 앞을 지나가려다, 세종대왕을 뵙고 가려고 길을 틀었다. 김영원 명장이 빚고 부어 만든 인자한 세종대왕의 얼굴을 뵈면, 왠지 마음이 가벼워질 것 같았다. 그런데 웬걸 세종대왕은 우울한 눈빛으로 내려다보고 있었다.

늙수그레한 신사들이 넥타이를 매고 죽 늘어서서 기자회견을 하고 있었다. 요즘 기자회견이란 신고하지 않고 할 수 있는 일종의 시위다. 그날은 문화재청에서 광화문 현판의 복원식을 6시부터 거행 하기로 한 날이었다. 광화문루는 화려한 휘장에 휩싸여 있었고, 행사 준비로 조명 장치가 높이 올라가 있었다. 그런데 세종대왕 앞에는 “광화문 현판의 가짜 복원을 반대한다”는 현수막을 펼쳐놓고, 노장들 이 소리를 지르고 있었다.

나도 문재인 정권 때부터 광화문 한자현판의 복원을 반대하는 시민운동에 참여해왔다. 광화문 현 판의 복원을 반대한다면, 누구나 의아해 할 것이다. 그게 무슨 반대할 일이냐고 말이다. 그런데 광화문 현판의 복원 문제는 간단치 않다. 우선 반대하는 사람들의 주장이 무엇인가부터 들어보자. 그들은 광화문 현판을 세종대왕이 만든 자랑스러운 ‘한글’로 만들어 걸자는 것이다. 1968년에 박정희 대통령이 광화문루를 시멘트로 복원했을 때, 한글로 “광화문”이라고 써서 걸었다. 지금도 문화재청은 그 한글 현판을 어딘가에 보관하고 있을 것이다.
광화문루에 한글현판을 걸자는 주장이 박정희 대통령이 쓴 현판을 꺼내서 다시 걸자는 것은 아니다. 시멘트로 복원되었던 광화문루의 역사도 역사인 만큼, 박대통령의 현판을 꺼내서 걸자는 주장에도 일리는 있다. 그러나 요즘 한글현판을 걸자는 시민운동은 과거사에 얽매인 것이 아니다. 이왕 광화문루를 새로 지었으니, 미래를 내다보자는 것이다. 한글이 한국문화의 상징이 된 만큼, 한글로 현판을 만들어 앞으로 더욱 찬란하게 발전할 한글문명의 꿈을 담자는 것이다.

우리들은 중국 관광객들이 떼거지로 몰려와서, 자신들의 제후국에 온 양 “門化光” 현판을 배경으로 사진을 찍어대는 모습이 보기 싫다. 예전에 중앙청 건물에 일본 관광객들이 몰려와 사진을 찍어대던 모습에 질려서 폭파까지 시키지 않았던가? 더구나 한글세대의 젊은이들이 광화문을 쳐다보고 무슨 글자인지 갸우뚱하는 모습도 보고 싶지 않다. 한자 깨나 알고 있는 젊은이들이 “門化光” 현판을 보고, 자신 있게 “문화광”이라고 읽는 소리에도 소름 돋는다.

▲<사진1> 광화문 한글현판.

▲<사진2> 광화문 한자현판.

요즘 같은 세계화의 시대에 굳이 광화문 현판을 한자로 걸어놓을 이유는 없다. 우리말 공부와 한글 공부에 여념이 없는 세계인들에게 광화문의 현판을 한자로 만들어 보여줄 까닭도 없다.
우리는 자랑스러운 대한민국을 대표하는 광화문 광장을 새로 꾸미고 싶다. 광화문은 파리의 개선문이나 베이징의 천안문처럼 앞으로 대한민국의 대표 이미지로 만들고 싶다. 

요즘 한류가 전 세계를 휩쓸고 있다. 우리 역사상 처음으로, 세계인들이 대한민국의 문화를 예찬하고 좋아하고 즐기고 있다. 한류의 핵심에는 디지털 문자인 ‘한글’이 자리 잡고 있다. 우리의 최대 최고의 발명품은 한글이다. 그렇다면 우리나라를 대표하는 광화문의 현판을 세종대왕 이 창제한 당시의 글씨체로 만들어 붙이는 것이 마땅하지 않겠는가?

디지털 시대에 디지털 문자인 한글로 광화문 현판을 만들어 붙이면, 우리의 젊은 세대뿐만 아니라 세계인들이 열광할 것이다. 이미 탄력을 받은 한글 문명은 앞으로 폭발적으로 발전할 것이다. 머잖아 문명사 연구자들은 한국문명을 중국문명의 아류가 아니라 독자적인 문명으로 평가할 것이다. 광화문 한글현판은 찬란한 한글문명의 장도를 내딛는 상징이다.

혹시 한글로 새로 만들어 붙이는 것이 “문화재 복원의 취지에 어긋난다”고 생각할 수도 있다. 그러나 그렇지 않다. 우리의 전통은 궁궐이나 문루를 복원했을 때, 현판을 새로 만들어 붙이는 것이다. 복원할 때마다 시대성을 반영하여, 당시의 명필이 현판을 새로 썼다. 대원군이 광화문루를 복원했을 때, 옛날의 현판을 복원하지 않았다. 당시의 명필이었던 훈련대장 임태영이 썼다. 경복궁의 동서대문인 건춘문이나 영추문을 복원할 때도, 당시 명필이었던 김충현 선생이 현판을 새로 썼다. 사직단도 마찬 가지다.

광화문에 한글현판을 거는 것은 우리의 복원전통에 한 치도 어긋나지 않는다. 오히려 문화재청이 굳이 광화문의 현판을 1893년에 찍은 사진판을 모본으로 복사판을 만들어 붙여놓은 것이 문제다. 문화재 복원문제를 굳이 유물론적으로 좁게 해석하고, 우리의 복원전통을 무시하는 처사가 어찌 옳단 말인가? 문화재를 복원하는 까닭은 소중한 정신문화를 지키려는 것이다. 우리의 복원전통을 살려서 광화문 현판을 새롭게 만들어 걸어야 한다. 문화재청은 다시 생각해야 한다.

이런 생각으로, 세종대왕상 앞에서 벌어진 시위를 물끄러미 바라보고 있는데, 갑자기 시위대열에서 손짓을 한다. 나더러 시위대로 들어오라는 것이다. 마침 누군가 나를 알아보고 얘기했는지, 한글학회 관계자가 손짓을 한다. 초면인데도 나를 ‘잘 알고 있었다’면서 연설까지 해 달란다. 한글에 대한 자부심은 누구에게도 지지 않는 만큼, 즉석에서 한마디 했다. 그랬더니 다들 반겨주셨다. 그날은 세종대왕상을 보러 갔다가 우연히 함께 뜻깊은 시간을 보낸 행운의 하루였다.





김주성

김주성

한국교원대학교 명예교수

kim2417@gma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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