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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법린 선생을 추모하며, 우리말의 소중함을 다시 생각함

올해는 김법린 선생이 세상을 떠난 지 60주년이 되는 해이다. 그는 1899년 8월 23일 경북 영천군 신녕면 치산리에서 아버지 정택과 어머니 김악이 여사 사이에서 태어났다. 어릴적 이름은 진린이라 하였고, 승려로 출가하여 초기에는 법명을 법윤...


올해는 김법린 선생이 세상을 떠난 지 60주년이 되는 해이다. 그는 1899년 8월 23일 경북 영천군 신녕면 치산리에서 아버지 정택과 어머니 김악이 여사 사이에서 태어났다. 어릴적 이름은 진린이라 하였고, 승려로 출가하여 초기에는 법명을 법윤이라고 하였으나 후일 법린으로 개명하였고, 필명은 철아라고 하였으며, 호는 범산이다. 올해는 그가 태어난 지 125년이되는 해이고, 3월 14일이면 타계한 지 60주년이 된다.김법린 선생은 14살에 영천 은해사로 출가하여 승려가 되었으며, 이후 범어사로 자리를 옮겨 명정학교를졸업하고 서울로 올라가서 불교계 근대 학교였던 중앙학림에 입학하였다.
그는 1919년 2월 28일 계동에있던 한용운 선생의 집, 유심사에서 중앙학림 학생들 신상완·백성욱·김상헌·정병헌·김대용·오택언·김봉신·박민오 선생 등과 함께 천도교에서 운영하는 보성사에서 인쇄한 독립선언서 만여 매를 배포하라는부탁를 받았다. 이후 이들은 당시 인근에 있던 범어사 포교당으로 자리를 옮겨 전국에 소재한 자신이 소속된 사찰을 중심으로 각자 역할을 분담하고 헤어졌다. 범산은 3월 1일 서울 파고다 공원 만세 시위에 참여하고 그날 밤 기차로 부산 범어사로 내려갔다. 예전에 함께 공부하였던 친구들과 협의하여 3월 19일 부산 범어사에서 가까운 동래 장터 만세 시위를 주도하였다. 이후 서울로 돌아온 그는 향후의 진로에 대해 고민하다가 결국 신상완·백성욱 등 동지들과 함께 그해 4월 상해에 성립된 임시정부로 밀항하여 국내 파견 특파원 활동을 계속하였다.

김법린 선생은 1920년 10월 남경에서 상선을 타고 프랑스 유학을 떠나 1923년 25세의 나이로 파리대학교 철학과에 입학하였고, 4년 후 졸업을 하고 대학원에 진학하여 근세 철학 연구를 시작하였다. 그는 1927년 2월 5일부터 14일까지 벨기에 브뤼셀 에그몽 궁전에서 개최된 세계피압박민족 반제국주의 대회에 당시 독일에서 유학하고 있었던 이극로·이의경(일명 이미륵)·황우일 선생 등과 함께 참가하였다. 해외에서의 이러한 그의 활약상이 국내 불교계에 알려지면서 불교계는 그의 입국을 종용하였다. 불교계의 입국 권유를 뿌리치지 못한 그는 1928년 고국을 떠난 지 8년만에 귀국길에 오른다. 귀국 후 그는 모교인 중앙불교전문학교 교수로 취임하여 후학들의 교육에 전념하면서 불교계의 혁신운동에 참여하게 된다.

이러한 와중에 김법린 선생은 이극로 선생과 함께 1927년 벨기에 브뤼셀에서 세계피압박민족대회에 참석하였던 인연으로 1932년 4월 조선어학회에 가입하였다. 조선어학회는 한민족의 언어와 문자 연구의 통일을 목적으로 조선어사전 편찬을 구상하고 실행에 옮겼다. 당시 조선어학회장이었던 이극로 선생은 1937년 동향의 선배이자 사업가인 이우식 선생에게 출자를 권유하여 그로부터 거액의 자금 출연을 약속받아 재단법인을 만들기로 하고 이인·안호상 선생 등과 구체적인 계획을 수립하였다. 이우식 선생은 이극로 선생의 독일 유학 시절부터 재정적인 후원을 하였으며, 귀국 후 조선어학회를 창립하여 활동하자 그 취지에 공감하여 자금 지원을 아끼지 않았다. 조선어학회에 대한 일제의 감시는 중일전쟁과 태평양전쟁 기간 동안 더욱 강화되었고, 조선어학회를 요주의 단체로 파악하고 있었다. 일제는 민족주의자들을 요시찰 인물로 감시하였고, 1938년에는 중등학교에서 조선어 교육을 금지하였다. 1940년에는 창씨개명과 신사참배를 강요하였고, 한글 신문인 『동아일보』와 『조선일보』를 폐간하였다.

조선어학회는 표면적으로는 한글 연구와 보급을 꾀하는 문화단체를 표방하면서 실질적으로는 조선 민중들에게 한글을 보급함을 통하여 민족의식을 고취시키고자 하였다. 김법린 선생은 1942년 10월 19일 동래에서 체포되어 함남 홍원경찰서에서 갖은 악형을 견디어야 했다. 1943년 4월 중순 일제는 악형과 고문으로 허위 자백을 받아 조선어학회원들에게 내란죄를 적용하여 조서 작성을 끝냈는데 취조를 받은 사람은 모두 48명이었다고 한다. 그 가운데 기소된 사람은 24명이었으며, 예심에 회부된 사람은 16명이었는데 그 명단은 다음과 같다. 이극로, 최현배, 이희승, 이윤재, 정인승, 정태진, 김법린, 김양수, 김도연, 이우식, 이중화, 이인, 한징, 정렬모, 장지영, 장현식 등이었다. 1944년 12월 21일부터 1945년 1월 16일까지 9회의 공판이 함흥 지방법원에서 열렸는데 김법린 선생은 다음과 같은 이유로 징역 2년에 집행유예 4년의 판결을 받았다.

김법린 선생은 장래 불교계를 짊어져야 할 청소년 불교도들에게 민족적 교양을 베풀어 소기의 목적을 달성시킬 것을 결심하였다. 그는 1934년 1월경부터 1935년 9월경까지 다솔사 부설 불교강원에서 수업 시간을 이용해서 학생들에게 다음과 같이 역설하였다. “조선인으로서 조선어를 모른다는 것은 조선인으로서 자각을 잃고 조선민족의 존재를 망각함에 이르는 것이다. 조선어의 발달은 조선민족의 발전에 지대한 관계가 있는 것으로서 조선어의 쇠퇴는 조선민족의 멸망을 의미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여러분들은 조선어를 연구하여 조선의 발달을 도모하지 않으면 안 된다”는 취지의 강의를 하였다. 「조선어학회사건 예심판결문」에 기록된 바에 의하면 김법린 선생은 또 이런 내용을 강의 시간에 학생들에게 전달하였다고 한다. “옛 조선의 고승들은 중국으로부터 전래된 불교에 조선의 민족적 문화 환경을 가미한 순조선민족적 불교로서 포교한 까닭으로 조선불교의 흥륭을 초래하였는데 여러분들은 그러한 고승들의 정신을 자기의 정신으로 하고 금일 쇠퇴하여 찌그러져 가는 조선불교를 부흥시켜서 조선의 향상을 도모하지 않으면 안 된다”는 내용을 수업 시간에 학생들에게 설파하였다. 김법린 선생은 조선어학회에 가입하여 한글보급운동을 전개하였으며, 1942년 조선어학회사건에 연루되어 2년이 넘는 세월을 감옥에서 보냈다. 그의 이러한 노력은 언어를 지키면 반드시 독립을 얻을 수 있다는 확신에서 비롯된 것이었다.



김순석

김순석

한국국학진흥원 수석연구위원

sskim@koreastudy.or.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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