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청주시립미술관에 전시된 내가 아는 것(작가: 강익중). 필자는 『한글새소식』 머리글에 조선어학회 수난을 이기고 돌아가신 날까지 한글을 사랑한 무돌 김선기 선생(1907~1922)이 힘쓰신 한글 운동의 발자취를 살펴보고자 한다. 무돌 선...
▲ 청주시립미술관에 전시된 내가 아는 것(작가: 강익중).
필자는 『한글새소식』 머리글에 조선어학회 수난을 이기고 돌아가신 날까지 한글을 사랑한 무돌 김선기 선생(1907~1922)이 힘쓰신 한글 운동의 발자취를 살펴보고자 한다.
무돌 선생은 연희 전문 스승이신 외솔 최현배의 추천으로 1931년 1월(23세)에 조선어학회 사전 편찬위원으로 일하게 되었다. 무돌은 한글학회의 전신인 조선어학회에서 젊은 학자로 ‘한글 맞춤법 통일안 제정’(1933) 2차 위원으로 참여하였다. 또한, 조선어학회 사전 편찬위원으로 언어학 전공자로서 연세가 높으신 스승님들을 모시고 원고 편집 및 편집회의 기록을 하는 일을 열심히 하셨다. 무돌 선생은 1934년부터 1937년까지 영국 런던대학원에서 저명한 언어학자 다니엘 존스(Daniel Jones)의 지도로 석사학위를 취득하였다. 1941년 연세대학교 교수로 재직 중, 조선어학회 사건에 연루되어 1942년 10월 21일 함경도 홍원 경찰서와 함흥 감옥에 수감되었다. 1943년 9월 18일 기소유예로 석방되었으나, 일제는 무돌 선생의 교수직을 빼앗고, 함북 아오지 탄광에서 석탄을 캐게 하는 일을 시켰다. 그 후, 1945년 8월 15일, 일제로부터 해방되어 연세대학교에 복직되었다.
무돌 선생은 1933년에 제정된 「한글 맞춤법 통일안」은 우리 민족 문화의 결정체이며 왜정 35년 동안 우리 민족이 광복을 대비해 놓은 업적으로 평가했다. 무돌의 제자 성백인 교수는 “1945년 미군정 시기에 한글이 ‘맞춤법 통일안’(1933)이 없었다면 한글은 미개한 언어로 취급되었을 것이다. 일제강점기에 조선 독립을 준비한 애국적인 사업이었다.”라고 평가하셨다.
무돌 선생은 주시경·최현배·이극로 선생의 정신을 이어받아 평생을 한글 전용의 필요성을 강조하셨다. 무돌 선생이 1931년 지으신 최초의 논문 「우리말 순화론」(1931)에서 “말은 민족의 생명이며, 제 나라 말을 사용해야 한다.”고, “우리 말을 살려 쓰자.”고 주장했다. 1931년 10월 24일자 『동아일보』 기사에 무돌 선생은 “한자 사용을 제한해야 한다.” 고 역설했다. 또한 토박이말 두루쓰기를 주장하여, “소리낱(음소), 닫소리(자음), 열소리(모음), 맺음말(결론)” 등의 새로운 용어를 제시하셨다.
1956년 무돌 선생은 서울대학교 언어학과 교수 재임 시절 언어학 발전을 위해 ‘한국 언어학회’ 를 창립하였다. 그 이후에 학계를 떠나 무돌 선생은 1957년~1960년에 문교부 차관을 역임할 당시, 한문으로 쓰였던 국가 공문과 서울 거리에 붙어 있던 한자 간판을 한글로 바꾸도록 하는 정책을 추진했다. 무돌 선생은 후일 한글 전용 정책을 공론화한 것이 가장 잘한 일이라고 회상하셨다. 무돌 선생이 문교부 차관직에 있으면서 한글 전용 정책을 추진하고, 「로마자의 한글화 표기법」을 제정한 것은 주시경·이극로·최현배·김윤경 등의 학자가 주장한 한글 전용을 실천하고, 나아가서 로마자화를 통해 한글의 세계화에 박차를 가하였다.
무돌 선생은 1948년 문교부에서 외래어 표기법과 한국어의 로마자 표기법 제정위원으로 활동하였는데, ‘ㄱ, ㄴ, ㅂ, ㅈ’ 를 ‘k, t, p, ch(크, 트, 프, 츠)’ 로 발음하는 미국식 로마자 표시법에 반대하였다. 『한글을 로마자로 적는 법』(1948)에서 예를 들면, 성(姓)인 김(Gim)을 킴(Kim)으로 쓰는 것은 한글 소리음을 제대로 발음하지 않는 표기라며 옳지 않다고 보았다.
1983년에 한글의 로마자 표기법은 매큔 라이샤워(MaCune-Reischauer) 방식으로 바뀌었는데, 무돌 선생은 “문교부가 1959년에 제정한 『한글의 로마자 표기법』을 헌신짝처럼 버리고 매큔 라이샤워의 방식을 채택하는 것은 길을 두고 뫼로 가는 것”이라고 통탄하였다. 그러나, 컴퓨터가 일상화되자 실용성이 없는 매큔 라이샤워 방식은 더 이상 활용성이 없다고 판명되어, 2000년 「국어의 로마자 표기법」이 다시 고시됨으로써 늦게나마 문교부가 1959년에 제정한 「한글의 로마자 표기법」으로 되돌리게 되었다.
무돌 선생은 한글 전용의 의의는 민족의 독립정신, 민주정신, 과학정신의 발현이라고 강조하였다. 『한글만 쓰는 데 할 일』(1970) 1965년에 펴낸 『문자정책론』(1965)에서 한글 전용은 한글 창제 못지않게 커다란 뜻을 품고 있다. 한글을 전용하게 되면 지배자와 피지배자, 노년층과 소년층을 가로막고 있는 문화생활의 장벽이 무너질 것이라고 설파했다.
1970년대에 어린 딸인 필자와의 대화에서, “한국에서 한글 전용이 실현되면, 한국은 세계에서 10대 강국이 될 것이다.”라고 굳은 믿음을 가지고 말씀하였다. 50년이 지난 오늘, 이 말은 바로 실현되었다. 1960~70년대만 해도 『동아일보』, 『조선일보』 신문의 기사에는 국한문을 혼용하여 대학생들도 사전을 보면서 신문을 읽었다. 나는 한글 전용을 하면 고대 시가를 후세대에 어떻게 전달하는가에 대해 나는 아버님에게 여쭤보았다. 아버님은 아녀자나 일반인은 일상생활에서 한자를 쓸 기회가 그다지 많지 않기에 사람들이 모두 한자를 배우는 것은 배우는 데 시간을 낭비할 필요가 없으며 경제적 효율성이 떨어진다고 설명하셨다. 다만 지식인 가운데 고대 문헌을 연구하는 사람들은 집중적으로 한자를 공부해야 한다고 말씀하셨다. 한글 전용을 주장했던 무돌 선생은 다른 학자로부터 많은 비난을 받았어도 그 뜻을 굽히지 아니하셨다.
한글이 과학적인 문자로 거듭나게 기틀을 마련해 주신 한힌샘 주시경 선생과 그를 따른 최현배· 이극로·김윤경·이윤재·정인승 선생 등 한글맞춤법을 제정하신 한글 학자들의 뜻을 이어받아 훌륭한 후학들을 길러내셨다. 무돌 선생의 제자들은 서울대학교 허웅·김방한·이현복·성백인 교수와 2세대 교수로 한글학회 이사장 권재일 교수와 한글학회 회장 김주원 교수 등이 있다. 미국 하와이 주립대학의 손호민 교수는 미국에서 한국언어전공 박사를 길러내는 세계에서 저명한 학자이다. 무돌 선생은 한평생 한글을 연구하고 후학들에게 한글 사랑을 가르치신 큰 스승이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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