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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통을 위한 두 바퀴, 문해력과 전달력

아침에 출근하려는 남편에게 부인이 묻는다. “오늘 공룡은 뭘 먹을 거예요?” 공룡이라니, 남편은 무슨 농담인가 하며 적당히 웃어넘긴다. 출근한 회사에서 남자는 이제껏 들어보지 못한 이상한 말을 여기저기서 듣는다. 오후쯤에는 주위 사람과 아예 ...

아침에 출근하려는 남편에게 부인이 묻는다. “오늘 공룡은 뭘 먹을 거예요?” 공룡이라니, 남편은 무슨 농담인가 하며 적당히 웃어넘긴다. 출근한 회사에서 남자는 이제껏 들어보지 못한 이상한 말을 여기저기서 듣는다. 오후쯤에는 주위 사람과 아예 소통이 안 되는가 싶더니, 퇴근 무렵에는 동료로부터 이상한 사람으로 취급받는다. 두려움에 서둘러 퇴근한 집에서 남자는 가족과도 더 이상 말을 주고받을 수 없다. 단 한나절 만에 주위의 말이 다 달라져 버린 것이다. 집에서도 밖에서도 그 누구와도 소통되지 않는 이 남자는 이제 어떻게 살아갈 것인가?

이것은 어릴 때 본 가상 드라마이다. 주말 저녁 아주 늦은 시간에 방영된 이 드라마는 ‘사람이 만약 사망일을 안다면?’, ‘어느 날 우리 집 반려견이 내 주인이 된다면?’과 같은 이야기들을 하나씩 다뤘다. ‘믿거나 말거나’ 한 소재였지만, 당시 호기심 많은 초등학생에게는 꽤 흥미진진한 이야깃거리였다. 특히 ‘나만 빼고 말이 달라진다면?’이란 그날의 주제는 생각한 것보다 더 공포스러웠다. 오죽하면 다음 날 아침, 드라마처럼 주위의 말이 안 들릴까 봐 하루 종일 걱정했던 기억이 선명하다.

자고 일어나면 갑자기 말이 달라지는 세상, 그런 일은 없다. 그러나 서서히 바뀐 말이 사람과 사람을 단절시키는 일은 언제든 생긴다. 최근 노랫말 한 구절로 우리말 ‘사흘’이 또 한 번 주목을 받았다. 하루, 이틀, 삼일, 사흘 순으로 쓴 구절이 문제였다. 사흘을 사일로 잘못 안 것인지, 사흘을 두 번 쓴 것인지 알 수 없다. 그런데 사흘을 잘못 알고 있는 대학생을 만나는 것은 그리 어렵지 않다. 사실 그런 대학생을 나는 이미 25년 전에 만났다. 한 외국인 교수가 한국어 수업을 등록하러 왔는데, 도와주러 함께 온 대학생이 사흘을 사일로 통역하던 일이 있었다. 지금은 누리소통망(SNS)으로 소통이 투명해져, 그런 오류가 쉽게 또 널리 밝혀진다. 비록 두 말 앞에서 헷갈리는 사람들이 많다손 치더라도 말을 잘못 알고 그냥 쓰는 데 면죄부를 줄 수는 없다.

외국어었다면 어떻게 했을까? ‘no’와 ‘not’을 구별하고, ‘not’을 ‘nod’이라고 쓰지 않는 사람들이 ‘아니요’와 ‘아니오’, ‘아니에요’와 ‘아니예요’를 뒤섞어 쓰는 것은 태도의 문제이기 때문이다. 하나쯤은 틀려도 된다는 의식이 소통이라는 길에 구멍을 내기 시작한다.

이쯤에서 늘 화두가 되는 것은 ‘문해력’이다. 문해력이란 글을 읽고 이해할 수 있는 능력을 말한다. 굳이 글에서만이 아니다. 문해력이 떨어지면 남의 말을 알아듣는 데도 문제가 생긴다. 얼마 전 어느 선생님이 학부모의 말에 크게 오해했다는 일에 대해 들었다. 사건의 개요를 보니 학부모는 개인적인 의견이란 말로 ‘사견’이라했는데, 듣는 사람이 ‘올바르지 못한 요사스러운 의견’으로 오해하면서 버럭 화를 냈다는 것이다. 자신이 아는 말은 맞고 조금 다른 말은 틀렸다고 여길 때 소통의 벽은 쌓이기 시작한다. ‘한 사람이 쌓아도 벽이란 생긴다지만, 나를 향해 벽을 쌓으면 반은 내 책임’이라는 노랫말이 딱 맞는 예이다. 이 세대의 문해력을 걱정하는 많은 지적들이 있지만, 이런 염려는 말에 관심을 가지고 알아가는 자세를 갖추면 해결되는 일이다.

그런데 문해력만큼 사회가 함께 관심을 두어야 할 큰 문제가 있다. 바로 전달력이다. ‘심심한 사과’란 예를보자. 기성세대가 공적 상황에서 한 ‘심심한 사과의 말씀’이란 기사를 읽고, 인터넷에서는 사과를 왜 심심하게 하느냐고 묻는 댓글이 있었다. 이것은 디지털 세대의 문해력 부족을 지적하는 사회적 반응으로 이어져서, 어휘력 테스트를 자주 하라거나 책을 손에 들라는 등의 기사가 쏟아졌다. 그런데 처지를 바꾸어서 한번 생각해 보자. 그 어린 학생이 심심한 사과라는 말을 하거나 들을 일이 있을까? ‘심심한 사과’를 못 알아들은 이유는 단지 문해력 부족의 탓만이 아니다. 오히려 듣는 상대에게 맞는 표현을 할 마음이 없는 기성세대의 전달력에서 출발한 문제가 아닌가?

사람은 말을 만들어 낼 줄 안다, 그리고 그 말은 시간이 지나면서 변한다. 이것을 언어의 역사성이라고 배웠다. 젊은 세대는 그것을 명분 삼으며 당당히 새말을 쓰고, 기성세대는 그런 면을 질타한다. 그런데 ‘내 말이 외계어가 되는 세상’은, 좀 더 구체적으로 상상해 보면 가히 공포스러운 일이다. 소통이 되지 않는다면 우리는 서로 용기를 주거나 위로하고, 칭찬하고 삶의 가치를 나누는 경험을 할 수 없다. 가족인데 나이 차이가 조금난다고 하여, 친구인데 다른 지역에 다른 환경에 산다고 하여, 또는 한 가족이 국경을 넘어 삶의 터전을 옮겼다고 하여 이런 경험을 나누지 못한다면 힘든 순간순간 어디서 힘을 얻겠는가?

 
처음 우리는 소통이 멈추는 순간을 상상해 봤다. 그런데 과연 주인공의 말만 빼고 세상의 말이 바뀐 것일까? 혹은 짧은 시간에 주인공의 말이 세상의 그것과 달라진 결과일까? 하나쯤, 둘쯤은 잘못 써도 남들이 알아들을 것이라는 위험한 마음가짐이 바이러스로 활동 중이다. 언어의 역사성은 적어도 내가 살아가는 동안에 일어나서는 안 되는 것이다. 소통의 벽이 생긴다면 그 책임은 오롯이 한 개인만의 몫이 아니다. 세상을 살아가려면 남의 말도 알아들을 줄 알고, 상대에 따라 적절한 말을 하는 법도 배워야 한다. 문해력과 전달력은 세상에서 나를 유지하는 두 개의 바퀴이다.




이미향

이미향

영남대학교 글로벌교육학부 교수 | leemh@ynu.ac.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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