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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글의 꿈, 세종의 꿈

세상에 성군은 많이 있었다. 백성을 위한 왕도 많이 있었다. 그렇지만, 세계사 전체를 바라보았을 때, 세종만큼 큰 그림에서 백성을 생각하고 큰 선물을 한 군주가 또 있을까?  나는 옥스퍼드에서 한글을 소개하는 강의를 매해 한다. 국보 70호인 『훈...

세상에 성군은 많이 있었다. 백성을 위한 왕도 많이 있었다. 그렇지만, 세계사 전체를 바라보았을 때, 세종만큼 큰 그림에서 백성을 생각하고 큰 선물을 한 군주가 또 있을까? 

나는 옥스퍼드에서 한글을 소개하는 강의를 매해 한다. 국보 70호인 『훈민정음』 해례본은 간송 전형필이 당시 만 천 원, 지금 돈으로는 30억 원을 주고 샀는데, 이것은 셰익스피어의 첫 번째 포트폴리오보다도 10배 이상 비싼 가격이다. 진정한 무가지보인 것이다. 친한 동료가 셰익스피어의 포트폴리오를 이야기할 때, 나는 『훈민정음』 해례본을 이야기한다. 사실, 언어학적으로도 이보다 중요한 문서가 세계사적으로 존재할까? 놀랍기만 하다. 하지만, 동시에 세계에 알려진 바가 아직도 미비하여서 언어학자로서 부끄럽고 안타깝다.

한글을 만든 세종은 도대체 어떤 꿈을 꾸었던 것일까? 
세종실록을 보면, 문자를 모르는 백성들이 탐관오리들에게 당한 수많은 억울한 일들이 기록되어 있다. 세종은 모든 사람들이 쉽게 문자 생활을 할 수 있도록 한글을 창제했다. 처음부터 새로운 문자를 생각한 것은 아니다. 처음에는 이두문이라도 백성들에게 가르치려고 했다. 그렇지만, 관리들은 백성들에게 이두조차 가르쳐서는 안 된다고 말한다. 

실록에는 다음과 같은 구절이 나온다.

“비록 사리를 아는 사람이라 할지라도, 율문(律文)에 의거하여 판단이 내린 뒤에야 죄의 경중을 알게 되거늘, 하물며 어리석은 백성이야 어찌 범죄한 바가 크고 작음을 알아서 스스로 고치겠는가. 비록 백성들로 하여금 다 율문을 알게 할 수는 없을지나, 따로이 큰 죄의 조항만이라도 뽑아 적고, 이를 이두문[吏文]으로 번역하여서 민간에게 반포하여 보여, 우부우부(愚夫愚婦)들로 하여금 범죄를 피할 줄 알게 함이 어떻겠는가.” 하니, 

이조 판서 허조(許稠)가 아뢰기를, 
“신은 폐단이 일어나지 않을까 두렵습니다. 간악한 백성이 진실로 율문을 알게 되오면, 죄의 크고 작은 것을 헤아려서 두려워하고 꺼리는 바가 없이 법을 제 마음대로 농간하는 무리가 이로부터 일어날 것입니다.” (세종실록 58권, 세종 14년 11월 7일)

세종은 누구보다 공부를 많이 한 왕이었다. 한글은 글자 하나하나가 논리 정연하게 만들어져 있다. 자음은 조음 기관을 본떠 기본자를 만들었고, 획이 하나 더해지거나, 문자가 중복되면 소리의 값도 질서 정연하게 바뀐다. 알파벳과 영어 소리 사이에는 이러한 논리가 없다. 그런데, 한글은 시각적 유사성이 청각적 유사성을 동반한다. 

오랫동안 우리 아이들이 다니던 초등학교에서 한국어를 방과 후에 가르쳤다. 집현전 학자 정인지가 말한 것처럼 하루아침에 배우지는 않았지만, 아이들은 한글을 배우는 것을 아주 재미있어 했고, 신기해 했고, 쉽게 배웠다.

최근 빅토리아 앨버트 뮤지엄에서는 한류 전시회를 기획해 이목을 끌었다. 나에게 가장 인상에 남은 점은 포스터에 한글이 가장 처음에, 가장 크게 등장한 점이다. 그렇지만, 요즘 트렌드에 비추면 이례적이지 않다. 런던 시내에서 한글로 된 상표들을 요즘 자주 접한다.

나는 한류의 원동력이자 다음 세대 한류 4.0 시대의 중심에는 한글이 있다고 생각한다. 2021년 한 해만 해도 트위터에 케이팝 관련 트윗이 78억 개에 달했다고 한다. 케이팝에서부터 드라마, 영화 등에 이르기까지 그 중심에는 우리의 말과 글이 있다. 대부분의 트윗은 한국인 팬덤이 아닌 글로벌 팬덤에 의해 작성되고 유통이 된다. 

나는 옥스퍼드 영어 사전의 한국어 자문을 맡고 있다. 작년에는 26개의 단어를 넣었는데, 앞으로도 많은 한류 출신 한국어 단어들이 사전에 들어갈 것으로 보인다. 팬덤 대부분은 한글을 아직 몰라서 로마자화한 한글 단어를 쓰고 있지만, 많은 팬들이 여기에 문제가 많다는 것을 알고, 한국어와 한글을 공부하려고 하고 있다.

세종은 어리석은 백성들이 쉽게 문자 소통을 위해서 가능하면 쉽게 만들었다. 자음은 다섯 개의 기본자를 배경으로 하였는데, 종성을 표현하기 위해서 새로운 문자를 도입하지 않고, 초성을 가져다가 쓴 것은 정말로 신의 한 수가 아닐까 한다. 모음 역시 기본 모음과 이중 모음 사이의 관계가 임의적이지 않고 체계적이다.

자음자 19개, 모음자 21개로 10,773개의 문자를 만들 수 있다. 받침을 따지지 않자면 399개의 소리 가능성을 문자화 할 수 있다. 도합 11,172개의 문자로 다양한 세계 언어의 소리들을 구현하는 데 부족함이 없다. 음성학자들이 쓰는 국제 음성 기호는, 일반인이 이해하고 쓰기 어려울 뿐 아니라, 타자하기도 어렵다. 그런데, 한글은 배우기도 쉽고 나타낼 수 있는 소리 가능성이 거의 무한하다. 

세계가 하나가 되고, 영어가 세계의 언어로 더욱 굳게 자리를 잡는 요즘 너도나도 다 로마자를 국가의 문자로 바꾸려고 한다. 과거 키릴 문자를 쓰던 곳에서도 로마자로 전향하는 움직임이 보인다. 한글이 로마자와 경쟁 관계에 있기는 어려울 것이다. 그렇지만, 나는 한글이 로마자의 음성적인 부족함을 잘 메꿔줄 수 있지 않을까 기대한다. 로마자는 그 자체가 음성 문자가 아니다. 영어 철자를 배울 때 이것이 가장 큰 문제 중 하나다. 다른 나라 언어들 특히 비유럽 언어를 로마자로 표기할 때 정확성이 떨어져서 혼란이 많이 생긴다. 얼마 전 월드컵 경기에서 한국의 김민재 선수를 “김민자이”라고 계속 발음하는 것을 들었다.

우리에게 한글은 최고의 문자이다. 그런데, 나는 한글이 우리뿐 아니라 세계인의 문자 체계로도 쓰일 수 있는 희망을 본다. 배우기 쉽고 체계적이며 공유할 수 있는 음성 플랫폼을 만들어 줌으로써 세계인의 소통에 도움을 주고, 나아가 교육의 기회가 없고 자국의 문자가 없는 이들에게 희망의 문자가 되지 않을까 생각해 본다. 세종의 꿈 역시 한글이 한국을 넘어 세계인의 문자가 되도록 날개를 달아 주는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든다.




조지은

조지은

옥스퍼드대학교 교수 | jieun.kiaer@orinst.ox.ac.uk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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