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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의 운명을 안고 태어나다

여주시(驪州市)가 나를 극진히도 추모하므로 늘 고마운 터에 뭔가 내 이야기를 들려주고 싶었다. 이제 세종신문 지면을 빌어 중요한 나의 얘기를 풀어내고자 한다. 나는 1397년 음력 4월 10일(양력 5월 15일, 태조 6년)에 경복궁 서쪽 준...

여주시(驪州市)가 나를 극진히도 추모하므로 늘 고마운 터에 뭔가 내 이야기를 들려주고 싶었다. 이제 세종신문 지면을 빌어 중요한 나의 얘기를 풀어내고자 한다.

나는 1397년 음력 4월 10일(양력 5월 15일, 태조 6년)에 경복궁 서쪽 준수방(지금의 서울 통인동, 서촌, 세종마을)에서 아버지 정안군 이방원(훗날 태종)과 어머니 정녕 옹주 민 씨(훗날 원경왕후) 사이의 셋째 아들로 태어났다.

할아버지 태조 이성계가 조선을 건국한 지 6년째 되던 해다. 이때는 이미 경복궁이 준공된 다음이었으므로 내가 태어난 곳은 경복궁 서문인 영추문과 가까웠다. 비록 경복궁 바깥이었지만 집에서 경복궁의 위엄이 보였고 그 기운이 집의 기둥을 받치고 있었다. 어찌 경복궁의 위엄뿐이었으랴. 북악산(삼각산)과 인왕산의 정기가 서려 있는 대저택이었으니 북악산과 인왕산의 정기는 더 깊이 서리었다. 지금은 냇가가 복개되었지만, 내가 태어날 때는 북악산과 인왕산에서 흘러내려 오는 냇가가 집 양옆으로 흐르고 있었다. 물살은 얕았다. 그러나 쉼 없이 흘러내리는 물에는 누구도 막지 못하는 기운이 서려 있었다.


내가 새 수도 한양(1396년부터 한성)에서 태어날 운명은 할아버지 태조가 새 나라를 세울 때부터 시작된 셈이었다. 왜냐하면 한양 천도는 조선 개국과 더불어 시작됐기 때문이다.

태조께서 즉위한 것이 1392년 7월 17일인데 한양 천도를 명한 것이 한 달도 안 된 8월 13일이다. 그로부터 일주일 뒤인 8월 20일에 아버지 이복 동생인 이방석을 왕세자로 세웠으니 훗날 피비린내 나는 왕자의 난은 건국 직후부터 조짐이 시작된 것이라 볼 수 있다.

내가 태어나기 2년 전인 1395년, 한양 천도를 명한 지 3년 만에 경복궁과 종묘가 준공되었으니 나의 운명은 경복궁의 역사와 더불어 시작된 셈이었다. 두 살 때(1398년) 제1차 왕자의 난, 네 살 때(1400년) 제2차 왕자의 난이 일어나 죽을 고비를 넘겼으니 누구나 그렇듯이 아버지의 운명이 나의 운명이었고 나의 운명이 아버지의 운명이었다. 아들 된 처지에서 어찌 아버지의 잘잘못을 논하겠는가? 나라의 기틀이 잡히지 않은 격동의 회오리가 나의 운명이었고 어찌 보면 나는 그 회오리를 평화로움으로 잠재워야 하는 운명이 정해진 것이었으리라.

내가 두 살 때 조선의 건국과 경복궁을 설계한 정도전이 아버지의 칼날에 스러진 것은 당시에는 어려서 몰랐지만, 동기와 과정이야 어떻든 가슴 아픈 사건이었다. 어찌 보면 정도전은 죽은 것이 아니었으리라. 경복궁의 기둥으로 경복궁을 휘감아 도는 조선의 정기로 살아 있었으리라. 아버지 태종은 정도전의 육신은 거두었지만, 건국에 바친 그의 영혼은 거두지 못했다.

아버지는 할아버지의 다섯째 아들이었지만 왕자 중 조선 건국에 가장 공이 컸다 한다. 아버지 태종은 1367년(공민왕 16년) 함경도 함흥에서 태어났다. 태조와 신의왕후 한 씨 사이의 다섯째 아들이다. 그는 어려서부터 남달리 총명하여 태조의 사랑을 받았다 한다. 자라면서 유학 공부에도 심취해 문무를 겸비하였으며, 17세가 되던 1383년(우왕 9)에 문과에 급제했다.

할아버지 이성계는 무인 집안에 학자가 한 명쯤 있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아들에게 특별히 학식이 높은 선생님을 붙여주고 여러 선비 학자들과 교류할 수 있도록 자리를 마련해 주기도 했다. 그러나 아버지는 글만 읽는 유생은 아니었다. 그에게는 할아버지 못지않은 무인의 기질과 큰 야망이 있었다.

할아버지 태조는 건국 후 7년간(재위 1392년∼1398) 왕위에 있었다. 내가 태어난 시기는 고려가 망하고 조선이 새로 건국한 지 얼마 안 됐던 때이므로 나라 안팎이 어수선하기 짝이 없었다.

격동의 시기에 어린 시절을 보낸 우리 형제들은 건국 초의 선한 자 악한 자 거리낌 없이 죽기도 하고 죽이는 정치적 소용돌이 속에서 정신적으로는 매우 어렵고 힘든 시간을 보냈다.

외숙부 둘이 역적이 되는 아픔을 가슴속에 묻기도 했다. 내가 임금이 된 뒤의 일이긴 하지만 장인이 무고로 역적이 되는 바람에 사약을 받고 돌아가셨다. 장모는 관노가 되었고 부왕이 돌아가신 다음에도 관노가 된 장모님을 풀어주지 못했다. 장인 심온은 내 다음 문종 때 돼서야 복권됐다. 아버지 태종의 결정을 뒤집지 못했기 때문이었다. 아내 소헌왕후의 속 쓰라림을 어찌 헤아릴 수 있을까?

고려 말, 고려 조정과 사회지도층이 부패로 백성의 삶이 극도로 곤궁하지 않았다면 나라가 망했을 리 없을 것이지만, 결국 나라의 운세가 다해 새로운 나라가 건설된 것이다. 고려 말의 부정부패는 회복 불능으로 극심했다. 백성은 개혁보다는 혁명을 선택한 것이다.

돌이켜 보면 고려는 4354년 전(기원전 2333년)에 건국한 고조선 단군왕검과 북부여, 고구려, 발해의 정통성을 이어받은 나라다. 동북아의 대국으로 450년을 존속해왔었다. 중화 대륙의 왕조들이 평균 존속 기간 200~300년에 비하면 장구한 세월이다. 중화 대륙의 송나라, 요나라에 당당했고 몽골과 오랫동안 격돌했던 나라이다.

할아버지 이성계는 전장에 나가 패배를 모르는 훌륭한 무장이었다고 역사는 전한다. 전쟁을 승리로 이끄는 전략과 전술이 뛰어난 장군이었다. 고려 말 대내외적으로 혼란했던 시대에 북방의 홍건적과 여진족을 물리쳤으며 왜적의 침입을 소탕했다. 왜적을 물리친 전공과 사람을 끌어모으는 능력이 출중한 관계로 인심이 모여 새로운 임금으로 탄생했던 것이다.

▲ 경복궁과 세종 탄생지, 그리고 영추문. (김슬옹 글/지문 그림, ≪역사가 숨어 있는 한글가온길 한바퀴≫ 23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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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 글은 저작자(박재택,김슬옹) 동의로 공유합니다.





세종

훈민정음은 백성들과 함께 /세종

한글 집현전(Editors)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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