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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만난 세종(5) 자주 사상가, 정치가 세종

변방의 속국, 문자와 문화로 세계의 중심에 서다 “우리나라 말은 중국말과는 달라 한자와는 서로 잘 통하지 않는다. 이런 까닭으로 글 모르는 백성이 말하려고 하는 바가 있어도 끝내 제 뜻을 글로 펼칠 수 없는 사람이 많다. 내가 이것을 가엾게 여겨...

변방의 속국, 문자와 문화로 세계의 중심에 서다

“우리나라 말은 중국말과는 달라 한자와는 서로 잘 통하지 않는다. 이런 까닭으로 글 모르는 백성이 말하려고 하는 바가 있어도 끝내 제 뜻을 글로 펼칠 수 없는 사람이 많다. 내가 이것을 가엾게 여겨 새로 스물여덟 글자를 만들어서, 모든 사람이 쉽게 익혀 날마다 편안하게 쓸 수 있게 할 따름이다.” _ 세종 서문(정음 취지문) 현대말 번역

1446년에 간행한 ≪훈민정음≫ 해례본 첫머리 나오는 세종이 직접 지은 이른바 ‘어제 서문’의 현대말이다. 고등학교 때 누구나 배우는 내용이다. 나 역시 고등학교 때 처음 배웠다. 서문 가운데 내 가슴을 울렁이게 하는 말은 ‘달라’라는 말이다. 조선 왕조는 중국 허락을 받고 나라 이름을 지었을 정도로 당시 중국에 대한 사대가 절대적이었다. 세종대왕이라 할지라도 예외가 될 수는 없었다. 그런 나라에서 문화와 예술, 과학 분야에서만큼은 철저한 자주를 실천하여 그 성과를 이룬 임금이 세종과 세종을 도왔던 인재들이었다.

세종이 한글을 창제하면서 첫 번째로 언급한 것이 우리나라 말이 중국말과 다르다는 선언이었다. 지극히 당연한 인식이었고 선언이었지만, 천 년 넘게 지배층과 지식인들은 그 다름을 모른 척하거나 무시하고 살아왔는데 세종이 느닷없이 ‘다름’을 선언한 것이다. 말은 다른데 중국 한자, 한문을 쓰고 있으니 말과 글이 일치가 안 되고 한자를 아는 사람과 모르는 사람이 소통(유통)이 안 되므로, 말과 글이 유통되고 누구나 소통이 되는 28자를 직접 만들었다는 선언이었다.

정인지도 “사방의 풍토가 구별되고 말소리의 기운 또한 다르다._해례본 정인지서”라고 그 다름을 다시 선언했다. 해례본의 주요 공저자인 신숙주도 동국정운 서문에서 “우리나라는 안팎 강산이 저절로 한 구역이 되어 풍습과 기질이 이미 중국과 다르니, 호흡이 어찌 중화의 소리와 서로 합치될 것이랴.”라고 말소리의 다름을 선언했다. 홍무정운역훈 서문에서도 사방의 풍토가 같지 않으므로 역시 기운도 다르다고 했다.
이렇게 우리 언어생활 모순에 대한 적극적 인식과 자주적인 문제 해결로 한글 창제가 되었으니 가장 독창적이고 자주적인 문자가 되었다.

▲ [그림] 세종 서문(정음 취지문) 내용 짜임새 © 김슬옹 제공.

한글을 만든 세종의 자주 사상 의미
한글을 창제한 세종을 ≪훈민정음≫ 해례본에서 “하늘이 내신 성인”이라고 한 것은 한글 창제ㆍ반포는 인류 문명사와 지성사의 기적으로 인류의 지식과 지혜의 역사를 처음으로 바꿔놓았기 때문이다. 인류는 문자 발명을 통해 문명과 지식과 지혜의 새로운 역사를 열어 왔다. 그러나 그러한 문자를 일부 특권 계층만이 독점함으로써 진정한 지식과 지혜의 문자가 되지 못했다. 그것은 시대의 한계이기도 했지만, 문자 자체가 어려워 모든 이가 평등하게 지식을 나눌 수 없었다. 한자는 물론이고 로마자도 정도 차이는 있을지언정 쉽게 배울 수 있는 문자는 아니었다. 일본의 가나 문자 자체는 쉽게 배울 수 있지만, 이 문자는 한자 도움 없이는 자립할 수 없는 문자다.

그런데 누구나 쉽게 배워 지식을 쌓고 지혜를 나눌 수 있는 문자가 처음으로 생겼으니 이 어찌 기적이 아니겠는가. 사대부 지식층을 대표하던 대제학 정인지는 ≪훈민정음≫ 해례본에서 한글 반포가 우리 겨레의 오랜 어둠을 가시게 해 주었다고까지 극찬하고 있다. 한자는 위대한 문자이지만 어려워 지식과 정보를 나눌 수 없었고 차별을 조장하는 문자 권력으로 내려왔기 때문이다.

이러한 기적의 문자를 창제할 수 있는 위치에 있는 이는 오로지 세종밖에 없었다. 사대부들은 한자 외의 문자를 상상하는 것조차 불가능했다. 해례본 저술을 도왔던 8명조차도 개인적으로는 한글을 쓰지 않았다. 최만리 등 7인의 반대 논리인, 작은 중국(조선)으로서 중화의 문자(한자) 외 문자를 사용할 수 없다는 것은 당시 지배층으로서는 지극히 보편적인 생각이었다. 지금 시각으로 그런 논리를 비판하는 것이 아니다. 사실이 그랬다는 것뿐이다.

해례본 저술을 도와준 집현전 학사들이나 반대한 학사들이나 한자에 대한 절대적인 태도는 같은 것이다. 이런 이들이 공동 창제에 참여했다고 생각하는 것은 억지를 넘어 역사 왜곡에 지나지 않는다. 사대부 출신의 신미 스님도 반포 후에 도와준 것이지 창제에 관여한 것이 아니다.

한자 쓰기의 언어모순을 온몸으로 고민하고, 언어학의 대천재이면서 거의 모든 학문에 정통했던 세종만이 아이디어를 낼 수 있었고 추진할 수 있었다. 뛰어난 학문적 능력만으로 생기는 아이디어도 아니었다. 책을 통한 소통과 교화에 절박함을 느낀 세종만이 할 수 있는 일이었다.

세종을 영웅화시키는 것도 신비화시키자는 것도 아니다. 사실을 얘기하는 것뿐이다. 해례본에서 사대부들의 세종 평가를 길게 논한 것은 그것이 역사의 사실이고 진실인데 아직도 그것을 믿지 않고 한글(훈민정음)을 집현전 학사들과 함께 만들었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많기 때문이다.

세종 친제설을 믿지 않는다는 것은 아래 표와 같은 해례본과 실록 기록을 믿지 않는다는 의미다.


더욱 중요한 것은 역사적 진정성이다. 세종이 문자를 처음 고민한 첫 기록(실록)은 30세 때인 1426년이었다. 법률문을 백성들한테 알리고 싶은데 양반 문신조차도 어려운 한문이라 걱정한 것이다. 창제 17년 전이었고 반포 20년 전이었으며 22살(1418년)에 임금 자리에 오른 지 8년 만이었다. 하도 답답한 나머지 1434년에는 만화를 곁들인 “삼강행실도”라는 책을 펴내지만, 한문의 절대적 어려움, 절대적 한계를 극복할 수는 없었다. 아마도 이때부터 본격적인 새 문자 발명에 몰입했을 것이다. 마침 이때는 한자 모르는 백성과의 소통을 위해 동물 그림으로 시각 표시를 한 앙부일구를 장영실과 만든 해이기도 했다. 더욱이 이때는 세종의 음악을 통한 소리 연구가 끝났을 무렵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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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 글은 <세종신문>에 필자가 연재했던 것입니다.





김슬옹

김슬옹

한글닷컴(Haangle.com) 연구소장/편집위원, 세종국어문화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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