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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연과의 만남, 치세지음 (治世知音:세상을 다스리는 음악)의 완성

나의 백성, 나의 신하들. 만백성의 어버이로서 그 누군들 소중하지 않겠는가? 그러나 솔직히 박연(朴堧)[1378(우왕 4)∼1458(세조 4)]을 만나지 않았다면 내가 학자로서 임금으로서 제대로 해낼 수 있었을까 의문이 든다. 박연은 나의 신하이...

나의 백성, 나의 신하들. 만백성의 어버이로서 그 누군들 소중하지 않겠는가? 그러나 솔직히 박연(朴堧)[1378(우왕 4)∼1458(세조 4)]을 만나지 않았다면 내가 학자로서 임금으로서 제대로 해낼 수 있었을까 의문이 든다.

박연은 나의 신하이기 이전에 나보다 19살이 많은 나의 스승이시자 동지였다. 박연은 위대한 연주자였고, 음악 이론가였으며 또한 훌륭한 학자요 관리였다. 박연으로 인해 나는 "잘 다스려진 세상의 음악. 태평한 세상의 음악"인 '치세지음(治世知音:세상을 다스리는 음악)'을 완성할 수 있었다.

박연은 고려 말기인 1378년(우왕 4년)에 충청도 영동에서 태어났다. 이 무렵, 영동은 경상도에 속했다. 11살 때 어머니를 여읜 박연은 피리를 불어 가며 어머니 생각을 하였다고 한다. 박연은 피리를 아주 기가 막히게 잘 불었다. 나의 후손 성현이 정리해 놓은 ≪용재총화≫에 의하면, 박연이 서울에 과거 보러 왔다가 피리 잘 부는 광대를 보고 피리를 불어 그 교정(校正)을 청하니, 광대가 크게 웃으며 말하기를, “소리와 가락이 상스럽고 절주(節奏)에도 맞지 않으며, 옛 버릇이 이미 굳어져서 고치기가 어렵겠습니다.”라고 하여 박연이 “비록 그러하더라도 가르침을 받고자 합니다.”라고 하고, 날마다 다니기를 게을리하지 않았다고 한다. 며칠 뒤에 그 악공이 박연 피리소리를 듣고는 말하기를, “규범(規範, 법도)이 이미 이루어졌으니 장차 대성할 수 있겠습니다.”라고 하였다. 또 며칠 뒤에는 광대가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무릎을 끓고 말하기를, “제가 따라갈 수 없습니다.”라고 하였다고 한다. 그 뒤에 과거에 급제하였으며, 또 거문고·비파 등 여러 악기를 익혀서 정묘(精妙)하지 않은 것이 없었다고 성현이 기록해 놓았다.

1411년(태종 11년) 박연은 생원 시험에 급제한 지 만 6년만에 문과에 급제하여 정5품 교리에 임명되었다. 아버지 태종이 발탁했지만 나의 시대를 더욱 빛낸 이가 둘 있으니 바로 박연과 장영실이었다.

박연은 집현전 교리로 일하면서 전악서를 찾아가 음악 공부를 본격적으로 하였다. 1418년(태종 18년)에는 왕세자에게 글을 가르치는 세자시강이 되었다. 이때 박연이 가르친 세자는 바로 나 이도(세종)였다. 1418년 6월 3일에 세자에 책봉되고 8월 8일 임금이 되었으니 임금 되기 직전에 만난 나의 스승이었다.

“세자 저하, 저는 벼슬보다도 피리를 더 좋아합니다.”
“한번 피리 소리를 들려주세요.”

박연은 때때로 나에게 피리를 불어 들려주고는 음악에 관한 이야기를 하였다. 내가 음운에 눈이 뜨게 되고 음악에 조예를 가졌던 것은 순전히 박연 덕분이다.

▲ (왼쪽) 세종실록 <오례의>에 실려 있는 편경도. (오른쪽) e뮤지엄 소장 편경(제작 시기 모름) . © 박재택 제공

박연을 관습도감의 악학 별좌의 자리에 앉혔다. 1426년(세종 8년) '의례상정소‘를 두어 영의정 황희, 우의정 맹사성, 허조, 정초, 신상, 권진 등에게 악률을 연구하도록 명하였다. 박연은 편경과 편종을 연구하여 마침내 1427년, 편경 12개와 거기에 맞는 12율관을 새로 만들어서 정확한 음율로 아악을 연주할 수 있게 하였다.

이것을 3년 뒤에는 수정하여 아악을 우리 음악으로 완성해 놓았다. 또한, 아악의 악보도 편찬해 냈다. 정인지가 대표로 1430년 윤12월에는 ≪아악보≫라는 책까지 펴냈다. 서문에 내 생각을 잘 정리해 놓아 직접 인용해 보기로 한다.

“음악은 성인의 마음씨를 기르며, 신과 사람을 조화롭게 하며, 하늘과 땅을 자연스럽게 하며, 음양을 조화시키는 방법이다. 우리나라는 태평한 지 40년을 내려왔는데도 아직까지 아악(제례음악)이 갖추어지지 못하였다. 공손히 생각하옵건대, 우리 주상 전하께옵서 특별히 생각을 기울이시와 중국의 채원정이 쓴 ≪율려신서(律呂新書)≫를 공부하시면서, 그 법도가 매우 정밀하며 높고 낮은 것이 질서가 있음에 감탄하시와 음률을 제정하실 생각을 가지셨으나, 다만 황종(표준음)을 갑자기 구하기가 어려웠으므로 그 문제를 중대하게 여기고 있었다. 마침내 신 등에게 명하시와 옛 음악을 수정하게 하였다.”

내가 임금이 돼서 가장 답답했던 것이 왜 중국식 음과 악기로 중국 음악을 각종 주요 행사 음악으로 들어야 했는가이다. 중국의 채원정이 쓴 ≪율려신서(律呂新書)≫는 훌륭한 음악 책이었으나 그것은 중국에서 그런 것이지 우리의 음악 이론서, 실용서는 턱없이 부족했다.

▲ <용비어천가> 한글 가사가 적힌 <세종악보> 봉래의 001a-b면 © 박재택 제공

내가 개발한 악보를 후손들은 ‘정간보’ 또는 ‘세종악보’라 부른다 하더구나. 바로 이런 악보와 그에 따른 음악 업적이 모두 박연의 도움으로 이룩된 것이다. ≪세종장헌대왕실록≫에 연대기와 별도로 부록처럼 136권부터 146권까지 11권으로 실어 놓았으니 그 방대함에 내 스스로 놀란다. 이 가운데서 136권과 137권은 아악보(한자악보)이고, 138권부터 146권까지 9권이 32개의 정간보로 구성된 악보인데 9권 중에서도 140권부터 145권까지는 ‘봉래의(鳳來儀)’라고 하는 악곡으로 여기에 훈민정음 반포 1년 뒤에 나온 <용비어천가>가 실려 있다. 바로 내가 반포한 훈민정음 덕에 “제1절:불휘 깊은 남간/ 바라매 아니뮐쌔/ 곶됴코 여름하나니/ 제2절:새미 기픈 므른/ 가마래 아니 그츨새/ 내히 이러바라래 가나니”와 같이 노래 가사가 소리 그대로 적히게 된 것이다.((김슬옹(2019). 세종, 음악과 도량형과 문자를 하나로 소통하다, ≪세종학과 융합인문학≫. 보고사. 참조)

이런 성과는 박연의 노력이 아니었으면 불가능했다. 무려 20년이나 걸렸다. 내가 박연과 더불어 본격적으로 우리식 음악에 매달리기 시작한 것은 내가 임금이 된 지 7년째인 1425년 무렵이다. 1425년에 박연이 힘써서 경기도 남양에서 중국의 경석(맑은 소리가 나는 돌) 못지않은 돌이 발견되어 우리식 편경을 만들 수가 있었다. 돌로 만들었으니 습도나 온도에 영향을 받지 않아 소리 변형이 없어 조율할 필요가 없기에 표준 악기로 딱맞춤이었다. 김슬옹 후손이 훈민정음을 음표와 같은 문자라 했는데 바로 봤다. 박연 덕에 가능한 일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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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 글은 저작자(박재택,김슬옹) 동의로 공유합니다.





세종

훈민정음은 백성들과 함께 /세종

한글 집현전(Editors)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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