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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민투표에 부친 공법(세법) - 공법 개정은 1427년 시작해서 16년만에 완성

내가 임금으로 있을 때 가장 중요시했던 것은 백성이라면 누구나 대접받는 세상 만들기, 백성의 살림살이, 외적으로부터 나라를 지키는 것, 이를 위해 무기를 개발하고 군대를 키우는 것이었다. 그래서 나는 임금으로 있는 동안 끊임없이 공부하고 연구했다...

내가 임금으로 있을 때 가장 중요시했던 것은 백성이라면 누구나 대접받는 세상 만들기, 백성의 살림살이, 외적으로부터 나라를 지키는 것, 이를 위해 무기를 개발하고 군대를 키우는 것이었다. 그래서 나는 임금으로 있는 동안 끊임없이 공부하고 연구했다. 또 이를 위해서는 무엇보다도 나라의 재정을 튼튼하게 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생각했다. 물론 나라의 재정이 튼튼해지려면 백성들이 먼저 잘 살고 배불리 먹어야 함은 당연지사였다.

이런 이유로 생각해낸 것이 세금 제도의 개편이다. 나라 세금 걷을 때 15%, 쓸 때 15% 새나간다면? 그것도 매년! 세금 걷을 때 새나 가는 돈, 예산 집행 시 새나가는 돈을 거둬들인다면 세금을 올리지 않고도 백성에게는 세금 부담을 줄일 수 있고, 나라에 대한 재정도 확충할 수 있다고 생각했다.
내가 즉위할 때까지는 세금을 매길 때 관리가 직접 논밭을 돌아보면서 농사의 수확량을 확인하고, 그에 따라 세금을 정했다. 이를 답험손실법(踏驗損失法)이라 한다. 이 방법은 최대한 공정한 수확량 산정을 위해 세 번의 측정을 하게 되는데, 다른 도에서 한 번, 지역 수령이 한 번, 중앙 관리가 한 번 하게 된 다. 이럴 경우 무슨 일이 일어날까? 현장조사를 하러 온 관리들에게 세금 좀 줄여 달라고 로비가 난무하고, 그러다 보니 로비 비용이 세금보다 더 나가는 것이 다반사다. 그렇다 보니 관리들의 주관적인 판단 때문에 세금이 들쑥날쑥 매겨졌고, 백성들이 그 피해를 고스란히 떠안는 일이 많았다.

▲ 세종성왕은 전제와 세제 개혁에 착수하여, 세종 25년(1443)에 전제상정소를 설치하였다. 그 결과 세종 26년(1444) 11월에 연분 9등법과 전분 6등법의 조 세 제도를 창안하였다. 이 그림은 당시 좌찬성 하연·지중추원사 정인지․판서운관사 이순지․주부 박윤창 등이 경기 안산에 나가 양전하는 광경을 세종대왕기 념사업회에서 기록화로 그린 것이다. (그림: 김학수 화백). © 세종신문

나는 이 폐단을 개선하고자 1427년 과거시험 문제로 공법 개정에 관해 묻고, 1429년 말부터 호조를 통해 여론조사를 준비했다. 백성들 투표에 부친 새로운 공법(세법)의 주 요 내용은 크게 네 가지다.

첫째, 경무법(頃畝法)을 버리고 종전대로 결부법을 쓴다.(조선 시대 토지면적의 기본단위인 결은 절대 면적이 아니라 쌀 300두(斗) 라는 생산량을 단위로 한 토지면적이다. 1결의 면적을 고정시켜 놓고 전품(田品)에 따라 차등 있게 조세를 거두는 것이 아니라 1결의 수세액(收稅額)을 고정해 놓는 대신 1결의 면적을 달리 하게 하였다.) 둘째, 5등 전 밑에 다시 1등을 설정하여 도합 전분6등법(田分六等法)으로 한다. 셋째, 과전법에서의 수조율은 1/10이었으나 공법에서는 1/20로 한다. 넷째, 풍년·흉년에 따라 연분9등법(年分九等法)으로 하며 각 등전의 수조액은 상상년(上上年)이 20두, 이하 등급별로 2두씩 체감하여 하하년(下下年)에는 4두로 한다. 군 현 단위 로 정한다.

병폐가 많은 기존의 수확량 기준 세법에서 정액제세법으로 개정을 추진했다. 토지의 비옥도를 6등급으로 나누고 해에 따라 농사 작황을 ‘상상(上上)’에서 ‘하하(下下)’의 9등급 으로 나누는 제도다. 토지 등급에 따라 1결 당 20두에서 4두를 세금을 내게 하는 것이었다.
1430년, 개정공법에 대해 양민 이상 17만 명을 대상으로 전국적으로 여론조사를 했다. 전국 여론조사 결과, 찬성 97,912인(전·현직 관료 및 이외 포함 98,567인), 약 57%, 반대 73,384인(전·현직 관료 및 이외 포함 74,149 인), 약 43%였다. 찬성 57% 반대 43%. 찬성이 많았으므로 그대로 시행하면 되었다. 그러나 나는 그럴 수 없다. 반대자가 43%로 꽤 많았기 때문이다.

▲ 공법(貢法)에 대한 가부 논의 결과[세종 12년(1430) 8월 10일](김슬옹, 2019, ≪세종학과 융합인문학≫ 185쪽. ©

지역별 결과는 경기도(99%), 개성유후사 (94%), 경상도(99%), 전라도(99%) 등이 찬성 쪽이 우세했고, 평안도(96%), 황해도(78%), 충청도(67%), 강원도(87%), 함길도(99%) 등 이 반대 쪽이 우세했다. 이렇게 지역별 차이 가 큰 것도 얼른 시행하지 못한 핵심 이유이 기도 했다.

3품 이상(당상관직) 및 3사 관리 찬반여론 조사 결과는 찬성 26인 안팎, 반대 89인 안팎이었고, 3품 이하(당하관직) 전·현직 관리 찬반여론조사 결과는 찬성 702인(현직 259 인, 전직 443인), 반대 510인(현직 393인, 전 직 117인)이었다.

찬성 과반인 조사내용에도 불구하고 반대 목소리를 참고해서 조세를 정해야 했다. 기득 권의 반발도 문제였지만 경기 경상 전라 3도 이외 대부분 지역이 반대하는 이유를 논의하고 개선책을 다듬어 나갔다. 이후 1436년 전인지를 통해 다시 논의하게 했다.

1438년 공법을 충청 경상 전라 6개 고을에서 시범운영 했다. 세수가 급증하자 반대론자들은 백성을 쥐어짠 결과물이라며 애민정치에 반한다고 공격했다.

이후 1443년 경상 전라 백성의 2/3가 찬성하면 거기서부터 하자는 타협안을 만들어 1444년 공법을 확정했다. 전분 6등법과 연분 9등법 제도가 탄생한 것이다. 각도 감사 (監司)는 고을마다 연분(年分)을 살펴 정하되, 공법의 개정으로 조정의 재정이 크게 좋아졌다고 역사는 전하고 있다.

이 공법은 조선 전기의 번영을 이끄는 핵심 세법이 되었고, 공법이 시행되고 30~40여 년 후 나의 증손자 성종 때에는 경복궁을 두 차례 중건하고도 남을 국부가 쌓이고 여진족에 대한 대규모 원정을 감행할 정도로 재정이 튼튼해졌다고 한다. 바야흐로 조선의 최절 을 찍게 만든 주효한 정책이었다고 자부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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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종

훈민정음은 백성들과 함께 /세종

한글 집현전(Editors)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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