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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글이 왜 세계적인 문자인가

1992년 교직생활을 하면서 우연히 돌아가신 공병우 선생님을 뵌 적이 있었다. 아마도 한글운동에 열심이었던 김슬옹 선생과 김두루한 형과 함께였을 것이다. 지금 기억하기로, 선생님 댁은 대문을 열고 들어가면 여러 층의 계단이 있었고, 중문을 지나...

1992년 교직생활을 하면서 우연히 돌아가신 공병우 선생님을 뵌 적이 있었다. 아마도 한글운동에 열심이었던 김슬옹 선생과 김두루한 형과 함께였을 것이다. 지금 기억하기로, 선생님 댁은 대문을 열고 들어가면 여러 층의 계단이 있었고, 중문을 지나면 작업실인지 아니면 서재인지 다양한 책들이 놓여 있었던 것으로 생각된다. 계단 양쪽부터 방 안에 이르기까지는 각종 타자기, 특히 장난감 타자기가 즐비했다. 선생님께서는 “서양 사람들은 어렸을 때부터 장난감 타자기를 갖고 노는 것이 습관화되어 글자의 기계화가 빠른 듯하다.”라고 말씀하신다.

 
그 당시 두루한 형의 추천으로 꽤나 인상 깊게 읽은 책이 있었다. 송현 선생님이 지은 『한글 기계화 개론』(1984, 청산)이다. ‘한글 기계화’, 그 당시에는 다소 생소한 용어였는데, 지금으로 본다면 이 책은 국어정보학 분야의 초기 저작물에 해당한다. 돌이켜 보면 송현 선생님의 기계화 개론은 본질적으로 한글 타자와 관련된 문제로부터 시작된다. 그렇기 때문에 공병우 선생님과 송현 선생님의 한글 기계화는 불가분의 관계에 있는 셈이다.

두루 알려져 있듯이, 공병우 선생님은 세벌식 타자기를 개발한 분이다. 내가 타자기를 처음 사용한 때는 1985년으로 두벌식으로 된 외솔타자기였다. 흥미롭게도 이 타자기는 초성 된소리를 칠 때면 같은 글자를 두 번 두드리는 방식을 취했다. 

예를 들어 ‘따’라는 음절을 입력하면 ‘ㄷㄷㅏ’와 같은 꼴이 된다. 이러한 글꼴이 탄생한 이유는 두벌식에서 오타 발생률이 높은 누름 글쇠를 적게 활용하기 위해 된소리의 경우 같은글자를 반복하여 치도록 했기 때문이다. 아마도 일상적인 한글에 익숙한 사람이라면, 이 글꼴이 꽤나 눈에 거슬렸을지도 모르겠다.

작년 가을, 한글박물관에서는 제4회 한글 실험 프로젝트 전시의 한 방편으로 ‘근대의 한글 실험’이라는 주제 아래 흥미로운 전시회를 개최하였다. 근대의 한글 실험은 훈민정음 창제 당시의 한글 사용법이 근대에 이르러 어떻게 변화했으며, 어떠한 실험이 이루어졌는가를 보여주는 전시회였다. 

그 가운데 주목할 점은 줄글 형식의 글쓰기에서 의미 변별을 위한 띄어쓰기와 문장부호가 탄생하는 과정, 한글 글꼴의 다양한 변화와 미적 감각, 타자기와 컴퓨터의 발명에 따른 한글 정보화 등이라고 할 수 있다. 이러한 실험 가운데 하나가 ‘풀어쓰기’이다.

‘풀어쓰기’는 훈민정음 창제 당시 이른바 ‘부서법’에 따른 왼 옆 붙여쓰기와 아래 붙여쓰기를 로마자 처럼 나란히 풀어 쓰는 것을 의미한다. 예를 들어‘훈민정음’을 풀어 쓰면 ‘ㅎㅜㄴㅁㅣㄴㅈㅓㅇㅇㅡㅁ’이 된다. 이 표기를 처음 주장한 분이 누구인지는 확인하기 어렵다. 1914년 주시경 선생님의 마지막 저서인 『말의 소리』 부록에 이 표기법이 나타나지만, 1912년 8월 5일자 러시아 지역에서 발행된 『대한인정교보』 제1호에도 ‘우리글 가로쓰기라’라는 제목의 논설이 실려 있다. 또한 이 신문 제1권 제11호(1914. 6. 1.)에는 이광수의 ‘ㅜㄹㅣㄱㅡㄹㅁㅗㄷㅜㅁ(우리글 모둠)’이라는 글도 실려 있다. ‘우리글 가로쓰기라’에서는 ‘우리에’를 ‘ㅜㄹㅣㅔ’로 쓰는 방식을 ‘가로쓰기’라고 불렀는데, 그 까닭은 글자를 오른 옆으로 나란히 쓰는 방식을 ‘가로쓰기’로 인식했기 때문이다. 여기서 풀어쓰는 방식을 ‘가로쓰기’라고 부를 것인가, 아니면 ‘풀어쓰기’라고 부를 것인가는 중요하지 않다. 다만 내가 이 방식을 ‘풀어쓰기’로 부르는 까닭은, 전통적인 한문식 글쓰기에 적용되는 오른쪽에서 왼쪽으로, 위에서 아래로 내려 쓰는 방식을 ‘세로쓰기’로 보고, 이에 대립하는 개념으로 위에서 아래로, 왼쪽에서 오른쪽으로 쓰는 방식을 ‘가로쓰기’로 부를 경우가 많음을 고려할 때, 개념상의 혼란을 피하기 위해 글자를 풀어 쓰는 방식을 ‘풀어쓰기’로 명명하는 것이 좋다고 판단하기 때문이다.

한글 기계화 과정에서 고민했던 풀어쓰기는 분명 누름 글쇠를 적게 활용함으로써 오타를 줄이기 위한 방편이었다. 그러나 풀어쓰기는 가독성의 차원에서는 효율성이 떨어진다. 왜냐하면 한글은 창제 당시부터 부서법에 따른 모아쓰기를 기본으로 했기 때문이다. 초성과 중성, 그리고 종성의 위치에 따라 글꼴이 확연하게 드러나고, 시각적으로 쉽게 인식할 수 있기 때문이다. 이에 대해 풀어쓰기는 아직 익숙하지 않기 때문에 쉽게 인지되지 않을 뿐, 그것이 보편화되면 눈에 익어 쉽게 알아볼 수 있을 것이라고 주장하는 경우도 없지 않다. 그러나 근대의 한글 실험에서 ‘띄어 쓰기’를 적용한 이유를 생각한다면, 풀어쓰기보다 모아쓰기가 적절한 까닭을 쉽게 추론할 수 있을 것이다. 『독립신문』 창간호에서 주장했듯이, ‘구절마다 떼어 쓰는 것’은 글이 위에 붙었는지 아래에 붙었는지 알기 어렵기 때문이었다. 마찬가지로 모아쓰기는 음절 경계를 한 눈에 보여주는 장점을 갖고 있다.

한글은 세계에서 가장 과학적인 문자이다. 이 명제는 이른바 어문민족주의에서 비롯된 표현이 아니다. 사실 나는 한국어가 세계에서 가장 어려운 언어라는 생각을 할 때가 많다. 발음에서 무성파열음이 받침으로 나는 현상이나 예사소리와 거센소리, 된소리의 삼중 대립 관계 등은 다른 언어에서 쉽게 찾아보기 어려운 현상이다. 그럼에도 한글은 언문일치 차원에서 가장 과학적인 문자다. 사전을 찾아보라. 우리말 사전은 등재 어휘에 발음 기호를 붙이지 않아도 되는 단어들이 반수는 된다. 다른 외국어 사전들은 각 표제어마다 발음 정보를 제시하지 않으면 안 된다. 즉 한글은 표기와 발음이 대부분 일치하는 문자다. 이 얼마나 과학적인 문자인가. 아마도 이처럼 편리한 글자생활은 훈민정음 창제로부터 오늘에 이르기까지 한글을 가꾸어 온 선인들의 공로일 것이다. 

이를 생각하면 정보화 시대, 인공지능 시대에 이른 오늘날, 국가 차원에서 한글의 과학화에 얼마나 투자를 하고 있는지 아쉬울 때가 많다. 한글은 곧 국력이다.





허재영

허재영

단국대 교육대학원 교수

hjy435@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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