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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조어 ‘개근 거지’ 유감

요즘 초등학교 학부형들의 단체 채팅방에서 ‘개근거지’라는 신조어가 다시 돌고 있다고 하는 뉴스를 접했다.  개근과 거지가 합해진 이 말은 하루도 빠지지 않고 매일 학교에 등교하는 아이들을 가리키는 말이라고 한다. 그러니까 체험학습 제도를 활용...

요즘 초등학교 학부형들의 단체 채팅방에서 ‘개근거지’라는 신조어가 다시 돌고 있다고 하는 뉴스를 접했다. 

개근과 거지가 합해진 이 말은 하루도 빠지지 않고 매일 학교에 등교하는 아이들을 가리키는 말이라고 한다. 그러니까 체험학습 제도를 활용해서 학기 중에 가족여행이나 친지 방문을 하는 학생들이 많아졌는데, 가정 형편상 그 제도를 이용하지 못하는 학생들을 일컬어 그렇게 부르는 신조어가 생긴 것이다. 학교를 성실하게 다니는 미덕을 폄하하는 말이 생겨 돌고 있다니 아무리 생각해도 무언가 한참 잘못되었구나 하는 생각을 하지 않을 수 없다.

필자가 초등학교에 다니던 1960년대에는 웬만한 일이 아니면 학교는 반드시 가야만 하는 것으로 여겼다. 도시화된 지역은 학교가 비교적 가까이 있어 등하교가 크게 어렵지 않았지만, 시골에는 학교가 멀리 떨어져 있는 경우가 많았다. 심한 경우는 산 넘고 물 건너 수키로 미터를 걸어 등하교를 하는 아이들도 많았다. 날씨가 좋은 봄가을에야 그런대로 참을 만하지만 날씨가 궂은 날이거나 가만있어도 땀이 절로 나는 여름날이나 찬바람이 매섭게 몰아치는 겨울날의 등하굣길은 어린 학생들에게는 큰 고역이 아닐 수 없었다. 그럼에도 학교 가는 것을 당연히 여기고 큰 불평 없이 눈이 오나 비가 오나 집을 나와 학교에 갔다.

부모들은 자식들이 우등상은 못 타더라도 개근상은 타야 한다고 생각했다. 우등상은 공부 잘하는 몇몇 학생들의 차지였지만, 개근상은 성실하게 학교에 다니면 누구나 탈 수 있는 상이었다. 어디나 말썽꾸러기는 있기 마련이어서 땡땡이를 치는 학생들도 있었지만 대부분의 학생들은 성실하게 학교에 다녔다. 많은 수의 학생들이 개근상을 탔던 것으로 기억되는데 그것은 학교에 빠지는 것을 큰일로 생각했고 그만큼 학교의 권위가 살아있었다는 방증이다. 그런데 요즘은 학교에 빠지는 것을 그렇게 큰일로 생각하지 않는다. 우리 사회가 경제적으로 고속 성장하고, 방송과 인터넷 등 다양한 매체가 등장하면서 예전에 학교가 담당했던 역할은 축소되고 그 역할을 대신하는 것들이 많아졌다. 개인이 진행하는 체험학습도 같은 맥락이다. 교실 내 수업에서 벗어나 현장에서 직접 보고 느끼면서 배우는 체험학습을 학교가 다양하게 제공하기 어렵기에 개인에게 맡기고 학교는 결석을 출석으로 인정해 주는 것이다.

사회가 발전함에 따라 학교가 하던 역할을 나누어 가지는 것은 자연스러운 일이다. 그런데 역할을 나누는 것과 학교가 권위를 가지는 것과는 다른 문제이다. 여기서 말하는 권위는 학교가 아이들을 건전한 민주시민으로 성장시키기 위한 힘을 말한다. 잘못된 점이 있으면 고치게 하고, 부족한 점을 채워 넣게 하려면 학교는 권위가 있어야 한다. 서구의 명문 사립학교일수록 학생들을 엄격하게 교육한다고 하는데 그것은 학교의 권위가 살아있기에 가능한 것이다. 우리는 어떠한가? 개근거지라는 말이 돌고 있는 것과 요즈음 교권이 바닥에 떨어진 기사들과 무관하지 않을 것이다. 참으로 염려스러운 일이다.

언어를 연구하고 교육하는 사람들이 우리말을 살려 쓰고, 어려운 한자를 쉬운 우리말로 바꾸고 하는 일도 중요하지만 언어를 바르게 쓴다는 것이 무엇이고 그것이 왜 중요한지 널리 알리고 바르게 쓰도록 지도하는 운동이 필요하다는 생각을 멈출 수 없다.

개근 거지라는 조어가 염려스러운 것은 이런 신조어들이 우리 사회의 병리적 분위기를 나타낸다는 데에 있다. 찾아보니 거지가 붙은 혐오 표현이 많이 있었고 꽤나 퍼져있는 모양이다. 주거가 어디냐를 가지고 만들어진 말이 많았고 옷의 상표로 차별화하는 혐오표현도 있다고 한다. 참으로 안타깝고 염려스러운 일이다. 이런 말들에서 남을 배려하는 전통적인 미덕은 찾아보기 어렵고 차별과 배제, 무시만이 남아있다는 것을 말하며 우리 사회가 건전하지 않다는 것을 말해준다. 그런데 개근 거지는 거지가 붙은 다른 말보다 더 문제점이 많다. 개근 거지라는 말이 성립되기 위해서는 가정이 필요하다. 즉 학기 중 해외에 나가지 않고 매일 학교에 나오는 것은 가난하기 때문이라는 가정이다. 그러나 평범한 가정에서는 학기 중에는 착실히 학교 수업을 받고, 개별 체험학습은 방학을 이용하려는 계획을 세우는 것이 얼마든지 가능하고 그것이 더 일반적일 것이다. 그러니 개근 거지는 기호가 나타내는 내용이 사실임을 증명할 수 없는데 그렇다고 주장하는 꼴이다. 

이런 말을 사용하는 것은 정치권에서나 하는 선동적 언어 사용이라고 볼 수밖에 없다. 이런 선동적 언어는 무책임하며 공격적이어서 남에게 상처를 주게 된다. 그래서 방학 중에 해외여행을 계획하고 있던 가정에서 이 말이 돈다는 것을 듣고 서둘러 비행기 표를 예약하지 않을 수 없었다는 웃을 수 없는 일이 벌어지는 것이다.

개근 거지라는 말을 접하면서 우리는 전통적인 가치를 제대로 지키는 지도층이 많이 부족하다는 생각이 든다. 건전한 지도층이 든든하게 받치고 있으면 천박한 언어들이 돌지 않을 것이다. 아울러 언어를 연구하고 교육하는 사람들이 우리말을 살려 쓰고, 어려운 한자를 쉬운 우리말로 바꾸고 하는 일도 중요하지만 언어를 바르게 쓴다는 것이 무엇이고 그것이 왜 중요한지 널리 알리고 바르게 쓰도록 지도하는 운동이 필요하다는 생각을 멈출 수 없다.




이삼형

이삼형

한양대 국어교육과 명예교수

samhyunglee@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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