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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어연구학회의 창립과 의의

1. 115년 전통을 가진 한글학회는 1908년 국어연구학회라는 이름으로 창립하였는데 『한글모죽보기』라는 책이 발견되면서 초창기 학회의 모습을 볼 수 있게 되었다. 이 글에서는 한글학회 초창기의 20여 년의 모습을 구체적인 기록을 통해서 살...

1.
115년 전통을 가진 한글학회는 1908년 국어연구학회라는 이름으로 창립하였는데 『한글모죽보기』라는 책이 발견되면서 초창기 학회의 모습을 볼 수 있게 되었다. 이 글에서는 한글학회 초창기의 20여 년의 모습을 구체적인 기록을 통해서 살펴보면서 한글학회의 근본 뜻과 존재 의의를 생각해 보도록 한다.

학 회: 국어연구학회(1908) → 배달말글몯음(조선언문회)(1911) → 한글모(1913) 회 장: 김정진(1908. 8. 31.) → 주시경(1913. 3. 23.) → 남형우(1916. 4. 30.)

개화기 상동교회 청년학원에서 1907년, 1908년에 개최한 하기 국어강습소를 수료한 사람들을 중심으로 하여 최초의 우리 말글 학회라고 할 수 있는 ‘국어연구학회’가 창립되었다. 2회 하기 국어강습소 수료v날인 1908년 8월 31일에 봉원사에서 창립총회를 가졌는데, 초대 회장으로는 2회 국어강습소 수료자 가운데 당시 현직 교사였던 김정진 선생이 맡았다. 주시경 선생은 국어연구학회의 정신적 지주로서 “국문을 정리함이 가정을 청소함과 如하다”라고 강연을 하는 등 국문을 통한 자국사상 고양을 강조했고 학회의 ‘문전 저술위원’으로 역할을 하기도 했다.

이후 경술국치를 지나면서 ‘국어’라는 용어를 더 이상 쓸 수 없게 되어 주시경 선생 집에서 임시총회를 열고‘배달말글몯음’(조선언문회)이라는 학회 이름을 새로 쓰게 된다. 1912년 11월에 김정진 회장이 갑자기 중국 상해로 떠나고 나서 1913년 3월 23일에 사립 보성학교에서 총회를 열게 된다. 이때 학회 이름이 ‘한글모’로 바뀌게 되며, 주시경 선생이 직접 회장을 맡게 된다. 이때에 김두봉·윤창식·신명균·이규영 선생이 지금의 이사에 해당하는 의사원으로 선출되어서 각각 총무, 간사, 서기, 회계를 맡았다.

1914년 7월 27일 주시경 선생이 갑작스러운 죽음을 맞는다. 이에 학회는 중심을 잡지 못한 상태로 한참을 있게 되고 1916년 4월 30일에야 임시총회를 조선어강습원에서 열고 새로운 회장으로 강습원장인 남형우 선생이 겸직하게 하였다. 곧 학회는 강습원 중심으로 운영되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총무 윤창식, 서기 김두종, 회계 박재경, 간사 이치규 선생이 맡았다. 남형우 선생은 1911년부터 1917년까지 보성전문학교 법학 교수로 재직하면서 학회의 조선어강습원 원장을 맡고 있었다. 그는 이후 러시아와 중국에서 독립운동을 하였으며 임시정부 법무총장과 교통총장을 역임하였다. 이때 학회 및 강습원 일은 김두봉 선생을 중심으로 운영되었다고 알려져 있다. 이 당시 이규영·김병훈·신명균·권덕규·장두정·장지영·윤복영·이재갑·주재정·김두봉 선생이 의사원으로 임명되어 의사회를 구성하고 있었다.

2.
창립 총회록에 따르면 국어연구학회는 본래 “국어를 연구할 목적으로 한 會”라고 했다. 그러면서 ‘배달말글배곧’(1911)의 다른 이름인 ‘조선언문회’의 규칙에 따르면 “제2조 본회는 조선의 언문을 실행함으로 목적함”이라고 명기하고 있다. 이처럼 학회는 연구와 실행을 학회의 중요 목적으로 삼고 있었다. 실행은 구체적으로 국어강습소 및 조선어강습원을 통해서 이루어졌다.

강습소 이름: 하기 국어강습소(1907) → 국어강습소(1909) → 조선어강습원(1911) → 한글배곧(1914~1917) 강습소장: 김명수(1907), 주시경(1910), 문석렬(1912), 김병규(1914), 김용곡(1914) 강습원장: 남형우(1911. 9. 17.), 류근(1916. 11.)

학회 창립의 배경이 되었던 하기 국어강습소는 이후에도 제3회(1909), 제4회(1910), 제5회(1912), 제6회(1914)에 걸쳐 계속 운영되었다. 이때 하기 국어강습소 강의는 주시경 선생이 주로 맡아서 했으며, 이외에도 박태환·박제선·장지영·이규영·박준성·최현배·권덕규 선생이 담당했다.

▲한글모죽보기 한글배곧죽보기

국어연구학회에서는 상설 교육기관으로 ‘국어강습소’(1909)를 두었고 이것은 이후 ‘조선어강습원’(1911)으로 이름이 바뀌게 되며, 주시경 선생 사후 ‘한글배곧’(1914)으로 정착하게 된다. 국어강습소는 1909년과 1910년 두 차례 운영되어 총 71명이 졸업하였고, 이후 ‘조선어강습원’(1911)으로 이름이 바뀐 후에는 2014년까지 총 264명이 수료를 하게 된다. 이 시기에 주로 초등과에서 신명균 선생이 강의를하였고 중등과와 고등과에서는 주시경 선생을 비롯하여 이규영·김두봉·권덕규 선생이 강좌를 맡았다.

앞서 본 것처럼 남형우 선생은 1911년에 ‘조선어강습원’ 원장을 맡고 주시경 선생 사후 1916년 4월부터‘배달말글몯음’(조선언문회)의 3대 회장을 맡았으며, 그해 11월에는 새로운 강습원장으로 류근 선생이 역할을 하게 된다.

3.
한글학회는 우리 말글 연구와 실행을 통해서 탄생하고 성장한 학회이다. ‘국어연구학회’, ‘배달말글몯음(조선어강습원)’에서 ‘한글모’, 그리고 지금의 ‘한글학회’로 이름이 바뀌어 왔다. ‘배달’이 ‘한’으로, ‘말글’이 ‘글’로, ‘몯음’이 ‘모’로 바뀐 것을 알 수 있다. 한글학회의 ‘글’이 본래 ‘말글’을 포괄하는 표현이었구나 생각해 본다. ‘한글’의 ‘한’이 ‘배달’의 의미를 지니고 있었다니 옷깃을 여미게 된다.

21세기 우리에게는 ‘한류’라고 하는 전 세계 문화의 최전방에 ‘한글’이라는 소중하고 강력한 무기가 있다. ‘연구’와 ‘실행’이라는 초창기 국어연구학회의 목적을 이제는 세계 속에서 실현해 볼 수 있겠구나 하고 기대하고 다짐해 본다.





이관규

이관규

한글학회 이사, 고려대 교수

kklee@korea.ac.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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