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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해도 방언을 가르쳐 준 선생님들

▲ 한재준의 한글놀이. 체험을 위한 설치 작업. 필자가 황해도 방언에 관심을 갖고 공부하게 된 것은 전북 완주에 ‘정농’이라는 황해도 마을이 있다는 것을 알게 되면서부터였다. 황해도 북서부에 위치한 송화, 은율 출신 주민들이 한국 전쟁 당시에...

▲ 한재준의 한글놀이. 체험을 위한 설치 작업.

필자가 황해도 방언에 관심을 갖고 공부하게 된 것은 전북 완주에 ‘정농’이라는 황해도 마을이 있다는 것을 알게 되면서부터였다. 황해도 북서부에 위치한 송화, 은율 출신 주민들이 한국 전쟁 당시에 피란 내려와 이곳에 마을을 이룬 것이다. 피란을 도운 것은 미군의 수송선이었는데, 사람들은 이를 ‘아구리 선’이라고 불렀다. 화물을 싣고 내리기 위해 뱃머리에 있는 큰 입구가 마치 커다란 ‘입’처럼 보였기 때문에 이러한 별명이 붙었다고 한다. 아구리 선을 타고 서해안을 따라 내려온 사람들은 인천, 군산, 목포 등 주요 항구에 내려 인근 지역으로 흩어지게 되었고 정농 마을도 이때 형성되었다.

마을 1세대들은 피란 오기 전에 언어 습득이 완료되었기에 황해도 방언을 비교적 잘 간직하고 있었다. 동향 사람들이 공동체를 이루어 함께 생활한 점도 고향의 말을 오래 유지하는 데 영향을 주었을 것으로 생각한다. 필자는 몇 해 동안 마을에 방문하여 이분들과 대화를 나누며 황해도 방언을 배울 수 있었다. 이렇게 마을 1세대 주민들의 말에서 확인한 언어적 특징 몇 가지를 간략히 소개하면 다음과 같다.

먼저 ‘ㅈ, ㅊ, ㅉ’ 발음에 관한 것이다. 중부 지역 방언 화자를 기준으로 보면 ‘ㅅ, ㄷ’은 치아 뒤쪽 잇몸(치조)에 혀를 대고 발음하고 ‘ㅈ’은 그보다 조금 더 뒤쪽 딱딱한 입천장(경구개)에 혀를 대고 발음하는 것이 일반적이다. 그런데 이 마을 1세대 주민들은 ‘ㅈ, ㅊ, ㅉ’을 ‘ㅅ, ㄷ’과 같이 치조 쪽에 혀를 대고 발음하였다. 이는 평안도나 황해도 북부 등지의 방언에서 확인되는데 이 마을 1세대 화자들에게서 이러한 특징이 확인된 것이다.

다음으로 ‘있다, -었-, -겠-’을 ‘잇다, -엇-, -갓-’ 등으로 발음하는 특징도 있었다. 현대국어에서는 일반적으로 ‘있어서[이써어], 먹었으니[머거쓰니], 가겠어[가게써]’와 같이 받침이 ‘ㅆ’로 실현된다.그런데 이 마을 1세대 주민들은 다음과 같이 ‘ㅅ’으로발음하였다. 이는 ‘있다, -었-, -겠-’ 등의 이전 시기 모습을 보여 주는 예로, 황해도 방언을 비롯한 북한 지역의 말에서 주로 확인되는 특징이다.

  • 노래할 사람이 잇으야지[이스야지]. (노래할 사람이 있어야지.)
  • 아흔일곱에 돌아갓어[도라가서]. (아흔일곱에 돌아가셨어.)
  • 무인 껀이 두 개씩이나, 껀이 잇갓어[읻까서]. (무슨 끈이 두 개씩이나, 끈이 있겠어.)

또한 ‘먹은 사과, 찾은 지갑’ 등에서 쓰이는 관형사형 어미 ‘-은’이 이 마을 1세대 주민들에게서는 ‘-안, -언’ 등으로 나타났다. 아래 예문을 보면, ‘박은, 먹은, 공부한’으로 실현될 법한 것들이 ‘박안, 먹언, 공부핸’으로 나타나는 것을 확인할 수 있다. 마치 동사에어미 ‘-어’가 결합할 때 ‘박아, 먹어, 공부해’로 실현되는 것과 동일한 양상이 확인된다는 점이 흥미롭다.

  • 말뚝 박안 그까지 다 뽑아 가지구, (말뚝 박은 것까지 다 뽑아 가지고,)
  • 우리 남동생 그 일곱 살 먹언 그. (우리 남동생 그 일곱 살 먹은 거.)
  • 일본으루 유학 가 가지고 공부핸 사람이라, (일본으로 유학 가 가지고 공부한 사람이라,)

마지막으로 동사 ‘듣다’에 관한 것이다. ‘듣다’는 ‘듣고, 들어서’에서 볼 수 있듯이 모음으로 시작하는 어미 앞에서 ‘ㄷ’이 ‘ㄹ’로 바뀐다. 그런데 이 마을 1세대 주민들의 말에서는 다음과 같이 모음 어미 앞에서도 ‘ㄷ’이 그대로 실현되었다. 이것은 평안도 방언에서 주로 확인되는 특징인데 이 마을 1세대들이 평안도와 인접한 황해도 북서부 출신이다 보니 이러한 특징이 나타난 것으로 보인다.

  • 옛날에 그 그거 듣으면서 무슨 연슥기, (옛날에 그 그것 들으면서 무슨 연속극이,)
  • 듣어 보문 고개를 끄덕할 수 있는 설교가 있고. (들어 보면 고개를 끄덕일 수 있는 설교가 있고.)

이상으로 정농 마을 1세대 주민들의 말에 나타난 황해도 방언의 특징을 간략히 정리해 보았다. 이분들을 만나 황해도 방언의 모습을 직접 관찰하고 배울 수 있었던 것은 개인적으로 큰 행운이었다. 외부인인 필자를 학생으로 받아 주시고 굴곡진 삶의 이야기를 나누어 주신 것 또한 깊이 감사할 일이다. 일주일, 길어야 한 달이면 집에 돌아갈 것이라 생각한 피란길이 어느새 70년을 훌쩍 넘기게 되었다. 그리고 두려운 마음으로 아구리 선에 올라탔던 십대 아이들은 이제 백세를 바라보는 노인이 되었다. 부디 이분들이 건강한 모습으로 오래오래 함께해 주시기를 바라 본다.



임지룡

장승익

강원대 국학연구소 연구교수

namoo119@gma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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