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소 : 경복궁 경회루 인근 정자 🟣시점 : 세종 28년(1446년), 훈민정음 반포 직후 🟣참석자 : 세종대왕, 정의공주 그리고 한글닷컴 강희연(강희안의 19대손) 기자 (정중히 절하며) 전하, 공주마마, 오늘 귀한 시...
🟣장소 : 경복궁 경회루 인근 정자
🟣시점 : 세종 28년(1446년), 훈민정음 반포 직후
🟣참석자 : 세종대왕, 정의공주 그리고 한글닷컴 강희연(강희안의 19대손)
기자
(정중히 절하며) 전하, 공주마마, 오늘 귀한 시간 내주셔서 감사합니다. 먼저 세종 전하께 여쭙겠습니다. 훈민정음을 창제하고 반포하는 과정에서, 가장 힘들었던 순간은 언제였는지요?
세종
(잠시 하늘을 바라보시더니..) 가장 힘들었다 하오면, 백성들이 글을 알지 못하여 억울함을 호소하지 못하는 현실을 오래 두고 보아야 했던 때이니라. 훈민정음을 만들기로 뜻을 세운 뒤에도, 여러 신하들이 “옛 제도를 바꾸면 나라의 근본이 흔들린다” 하여 거세게 반대하였느니라. 나 또한 그리 쉽게 나아갈 수 없었으나, 백성의 편안함을 위함이니 어찌 멈추겠느냐. 그 마음을 지키는 것이 가장 큰 고생이었느니라.
기자
정의공주 마마께 여쭙겠습니다. 반포까지 가는 과정에서, 아버지께 어떤 도움을 주고 싶으셨는지요?정의공주
아바마마께서 오랜 세월 병환과 싸우시면서도 학문과 백성 사랑을 놓지 않으시는 것을 뵈었습니다. 저는 비록 정치 일에 나설 수 있는 처지가 아니었으나, 아바마마께서 마음을 놓으실 수 있도록 곁에서 작은 안부를 전하고, 아바마마의 질문에 성실하게 답을 드리기 위해 노력했을 뿐입니다.
또한, 궁중 여인들에게도 새 글자를 익히도록 권하여, 반포 후 바로 쓸 수 있도록 준비하는 데 힘썼습니다.
기자
전하, 훈민정음을 반포하신 지금, 감사한 사람들이 혹시 떠오르십니까?
세종
그리하오. 무엇보다 집현전 학사들이지. 집현전의 최항, 박팽년, 신숙주, 성삼문, 이개와 같은 이들이 훈민정음 해레본 해설서를 쓰고 다듬는 데 지대한 공을 세웠느니라. 또한, 의논을 마다하지 않고 새 글자를 배우려 한 궁중의 여인들, 특히 정의공주와 소헌왕후 마마에게도 큰 감사를 표하고 싶구나.
기자
정의공주 마마, 훈민정음이 앞으로 어떤 역사적 의미가 될 것이라 생각하십니까?
정의공주
새 글자는 백성들이 더 이상 억울함을 속으로만 삭이지 않게 할 것이며, 먼 훗날에는 나라의 학문과 예의가 더욱 꽃피우는 기틀이 될 것입니다. 저는 이 글자가 단지 오늘을 위한 것이 아니라, 백 년, 천 년 뒤에도 후손들이 쓰고 읽으며 조선의 얼을 지켜줄 것이라 믿습니다.
기자
마지막으로, 전하께 여쭙겠습니다. 요즘 건강은 어떠하신지요? 그리고 이제 막 반포된 훈민정음에 대해 바라는 점이 있다면 말씀해 주십시오.
세종
(미소를 지으시며) 내 병약함은 예전과 다름없으나, 뜻을 이루었으니 마음은 평안하도다. 다만, 글자가 널리 퍼지기 전에는 여전히 쓰지 못하는 백성이 많을 것이니, 학문을 전하는 이를 곳곳에 두고, 어린아이부터 부녀자에 이르기까지 익히게 하였으면 하노라. 또한, 세월이 흐른 뒤에도 이 글자가 사라지지 않도록, 후대 임금들이 힘써 지켜주기를 바라느니라.
기자
오늘 귀한 말씀.. 정말.. 감사드립니다... 전하와 공주마마께서 말씀하신 것처럼, 훈민정음은 단순한 글자가 아니라, 백성을 향한 사랑과 나라의 기틀을 세우는 도구임을 다시금 느꼈습니다..
후손으로서 다시 한번 진심으로 감사할 따름입니다..
훈민정음 반포 직후에 진행한 정음1446 특별 기획 인터뷰는 여기에서 마치겠습니다. 전하와 마마께 다시 한번 감사드립니다.
[기자의 메모]
그날 경회루 근처에서 만난 세종과 정의공주는, 마치 바람처럼 조용하지만 깊이 스며드는 이야기를 남겼다. 세종의 목소리에는 병마에도 꺾이지 않는 의지가 담겨 있었고, 정의공주의 눈빛에는 부친을 향한 존경과 자부심이 어려 있었다.
두 분과의 인터뷰 내내 나는 그분들의 표정과 목소리를 통해 느낄 수 있었다. 반포된 훈민정음의 자모는 단순한 획이 아니라, 백성을 향한 애민의 마음을 새긴 역사라는 사실을 말이다.
강희연
한글닷컴 가상 기자 / 강희안의 19대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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