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음1446 ⓒHaan+ 훈민정음 확산을 위한 국가 시험 활용 세종대왕이 훈민정음을 보급하기 위해 국가 과거시험을 활용한 사실은 매우 주목할 만하다. 이는 《훈민정음》 해례본 반포 직후 전격적으로 시행되었는데, 당시 양반들에게 가장 거부...
정음1446 ⓒHaan+
훈민정음 확산을 위한 국가 시험 활용
세종대왕이 훈민정음을 보급하기 위해 국가 과거시험을 활용한 사실은 매우 주목할 만하다. 이는 《훈민정음》 해례본 반포 직후 전격적으로 시행되었는데, 당시 양반들에게 가장 거부할 수 없는 문턱이 바로 과거시험이었음을 세종이 정확히 간파하고 있었음을 보여준다.
1446년 12월 26일 역사적인 전지
1446년 음력 9월 상순, 《훈민정음》 해례본이 세상에 나왔다. 그리고 불과 3개월 후인 12월 26일, 세종은 역사적인 전지(傳旨)를 내린다.
"이제부터는 이과(吏科)와 이전(吏典)의 취재(取才) 때에는 《훈민정음》도 아울러 시취(試取)하게 하되, 비록 의리(義理)는 잘 모르더라도 글자를 맞출 수 있는 자를 뽑으라."- 《세종실록》 28년 12월 26일
해례본 반포 3개월 만에 과거시험 과목으로 지정한 것은 미리 준비하지 않고는 불가능한 속도였다. 더욱이 "철학적 해석(의리)은 잘 모르더라도 글자를 읽고 쓸 수 있는(맞출 수 있는) 자를 뽑으라"는 구절은, 훈민정음을 빠르게 확산시키려는 세종의 절박한 의지를 보여준다.
이과(吏科)와 이전(吏典) - 왜 여기부터였나?
세종이 유교 지식인의 등용문인 문과나 무과가 아닌, 이과(중인 계층의 기술직 시험)와 이전(실무 행정직)부터 훈민정음을 도입했을까?
이과 응시자들은 주로 실무 행정을 담당하는 중인 계층이었다. 이들이 훈민정음을 사용하면 행정 전반에 빠르게 확산될 수 있었다. 실제 행정 실무를 이들이 처리했기 때문에, 공문서에 훈민정음이 쓰이기 시작하면 양반들 역시 어쩔 수 없이 배워야 한다. 세종의 전략이 얼마나 치밀했는지 알 수 있는 대목이다.
1447년 함길도 특별 조치
4개월 후인 1447년 4월 20일, 세종은 더욱 강력한 조치를 내린다.
"함길도 자제 가운데 이과에 응시하는 사람에 대해서는... 점수를 배로 쳐 주라. 그리고 다음 식년(式年)부터 시작해서 《훈민정음》에 먼저 응시하게 한 다음, 입격한 사람에게 다른 과목에 응시하도록 허락하고, 각 관사의 이전을 취재하는 경우에도 함께 《훈민정음》에 응시하게 하라."- 《세종실록》 29년 4월 20일
여기에서 주목할 점은 세가지이다.
첫째, 지역 전략: 저항이 적은 변방(함길도)부터 시작하여, 그곳에서 성공하면 다른 지역으로 확대하려는 포석이었다.
둘째, 파격적 혜택: "분수를 배로 쳐 주라"는 파격적인 보상(점수 2배)을 통해 훈민정음 학습을 노골적으로 장려했다.
셋째, 필수 과목 지정: "《훈민정음》에 먼저 응시하게 한 다음, 합격한 사람에게 다른 과목에 응시하도록 허락"한다는 것은 훈민정음을 사실상 필수 과목으로 지정한 것과 같다. 훈민정음을 모르면 아예 다른 과목 시험도 볼 수 없는 구조를 만든 것이다.
정음1446 ⓒHaan+
시험도입과 출판 공세
세종의 전략이 뛰어난 점은, 시험 도입과 동시에 훈민정음을 쉽게 배울 수 있도록 출판 공세를 했다는 점이다.
1447년 《용비어천가》- 이과 시험 도입 직후 출판되어, 훈민정음의 학습 교재였을 가능성이 크다. 조선 건국 서사시라는 특성상 양반들도 읽지 않을 수 없었다.
1447년 《석보상절》- 불교 경전을 훈민정음으로 번역하여 대중적인 읽을거리를 제공했다. 당시 인구 절반이 불교 신자였으니, 자연스럽게 훈민정음을 익히게 하는 전략이었다.
1448년 《동국정운》- 한자음을 훈민정음으로 표기한 이 책은 한문 시험을 위한 필수 참고서가 되었다. 한문 시험을 보려면 정확한 한자음을 알아야 하는데, 그것이 훈민정음으로 되어 있으니!
세종이 노린 효과
1446년 12월 26일, 세종의 전지를 들은 양반들:"뭐라고? 이과 시험에 훈민정음이 나온다고?""아니, 해례본 나온 지 3개월 밖에 안 됐는데...""우리 집 아들이 내년에 이과 시험 보는데..."
더욱이 함길도 양반들은 더 난감했을 것이다. "훈민정음 시험을 먼저 봐야 다른 과목을 볼 수 있다고?", "점수를 2배로 준다니!.", "이거 안 볼 수도 없고, 볼 수도 없고…."
이것이 바로 세종이 노린 효과였다. 반대하고 싶어도 반대할 수 없는 구조를 만든 것이다.
훈민정음을 시험 과목으로 지정했는데, 만약 반대 상소를 올렸다가 과거시험 자격 박탈이라는 불이익을 당할 경우, 가문의 존속에 치명적이었다. 이로 인해 1446년 12월 이후 훈민정음 관련 반대 상소는 사라진다.
또한, 이과 응시자들은 훈민정음에 대한 거부감이 적었기에 이를 기회로 삼았다. 이들이 공직에 진출하면서 관청 문서에 훈민정음이 등장하기 시작했고, 행정 실무의 효율성이 높아지는 연쇄 효과를 낳았다.
세종의 실용주의
1446년 9월 해례본 반포부터 1448년 주요 서적 간행까지 불과 3년 동안 이 모든 일이 숨 가쁘게 진행되었다. 세종은 속도, 보상(혜택), 단계적 접근, 출판 보급이라는 현대적인 전략의 원리를 완벽하게 활용했다.
《세종실록》 28년 12월 26일과 29년 4월 20일의 기록을 보면 건조한 행정 명령 속에 세종의 절박함이 느껴진다. 자신이 만든 문자가 사장될까 봐, 백성들이 계속 문맹으로 살까 봐, 그 걱정과 조급함이 행간에 배어있다.
"비록 의리는 잘 모르더라도 글자를 맞출 수 있는 자를 뽑으라."
이 한 문장에 세종의 실용주의가 응축되어 있다. 일단 글자를 읽고 쓸 수 있게 하는 것이중요하다.
세종은 단순한 문자 창제자를 넘어, 제도를 설계하는 전략가였다. 과거시험에 훈민정음을 도입하는 이 단순하면서도 파격적인 결정이 한국 문자사를 바꾸었다. 우리가 오늘 한글로 자유롭게 소통할 수 있는 것은, 580년 전 그 겨울날 세종이 내린 전지(傳旨) 덕분이다.
정성현 / Jeong Seonghyeon
한글닷컴(Haangle.com) 인문미디어연구소장, 세종국어문화원 인문학연구소장
김슬옹
한글닷컴(Haangle.com) 한글연구소장/편집위원, 세종국어문화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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