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음1446 ⓒHaan+ 인공지능 영화 <정음 1446년>의 가장 극적인 장면 중 하나는, 광평대군 집 마당에서 임영대군 이구(李璆)가 내금위 무사들을 이끌고 자객들을 단숨에 제압하는 모습이다. 수많은 자객들을 뛰어난 무예로 막아내고...
정음1446 ⓒHaan+
인공지능 영화 <정음 1446년>의 가장 극적인 장면 중 하나는, 광평대군 집 마당에서 임영대군 이구(李璆)가 내금위 무사들을 이끌고 자객들을 단숨에 제압하는 모습이다. 수많은 자객들을 뛰어난 무예로 막아내고, 한자 기득권을 지키려는 반대파의 음모를 격파하는 그의 모습은 '세종과 훈민정음을 지킨 최고의 무사'라는 강렬한 인상을 남긴다.
과연 임영대군은 영화의 서사처럼 조선 전기 '최고 무사'라는 칭호를 받았을까? 왕실의 안위를 위협하는 자객들에게 "감히 전하를 해하려 하다니! 너희는 살아 돌아가지 못할 것이다!"라고 일갈하며 무력을 과시했던 그의 모습은 역사적 사실일까?
우리는 지금, 영화 속 멋진 활약을 뒤로하고 실록이라는 냉정한 잣대를 들이대 임영대군의 진짜 실력을 파헤쳐본다.
활쏘기 대회의 단골 참가자
실록에 나타난 구체적인 기록에 따르면 임영대군의 무예 활동이 일회성이 아님을 명확히 보여준다. 특히 세조 실록에는 임금이 후원(後苑)에서 주관한 활쏘기와 기마술(말타기) 시험 장면이 반복적으로 등장하는데, 놀랍게도 이 행사마다 임영대군의 이름이 빠지지 않고 등장한다.
한 기록에는 "이구(李璆)·신숙주·양정·이석형 등이 모시고 활을 쏘았다"고 명확히 적고 있다. 단순히 자리를 지킨 것이 아니라 직접 시연에 참여했다는 뜻이다. 또 다른 기록에는 200보 거리에서 활을 쏘고 기사(騎射, 말 타고 활쏘기)와 창술까지 시험했다는 구체적인 절차까지 상세히 남아있다.
특히 주목할 점은 임영대군이 이런 무예 행사에 '반복적으로' 참여했다는 사실이다. 이는 그가 체면치레로 나온 것이 아니라, 정기적인 훈련을 받았으며 실제로 활과 말을 다루는 데 능숙했음을 강력하게 시사한다.
'우등' 기록은 왜 없는가
그렇다면 임영대군의 실력은 당대 최고 수준이었을까? 실록을 보면 흥미로운 대목이 등장한다. 같은 무예 행사에서 '우등(優等)'으로 선정된 인물은 심응(沈膺) 같은 당대 명장이었고, 그들이 특별한 안장(鞍子)을 하사받았다고 기록되어 있다. 그러나 임영대군이 특별히 탁월하다고 칭송받은 기록은 찾아보기 어렵다.
하지만 임영대군 역시 포상을 받기는 했다. 한 기록은 홍윤성이 첫 발을 명중시켜 내구마(內廐馬, 궁중 마구간의 말) 1필을 받자, 뒤이어 임영대군에게도 말 1필을 하사했다고 전한다.
이 대목은 '실력'과 '신분'이라는 두 가지 가능성이 복잡하게 얽혀있다는 점을 시사한다. 하나는 임영대군이 실제로 포상을 받을 만한 상당한 실력을 갖추었다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왕족이라는 신분이 하사품 결정에 작용했을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다.
여기서 간과해서는 안 될 내용이 있다. 조선시대 궁중 무예 행사는 단순한 군사 훈련이 아니었다. 이는 왕권을 과시하고, 왕실 친족의 결속을 다지는 중요한 정치적 의례였다.
왕족이 무예 시연에 참여하고 포상을 받는 행위는, 그 자체로 왕실의 위엄과 무력을 대외적으로 보여주는 중요한 행위였다. 따라서 임영대군이 말을 하사받았다는 기록만으로 그가 전장에서 혁혁한 공을 세울 만한 '장수'였다고 단정하기는 어렵다.
임영대군의 사례는 조선시대 왕족 무인들이 처한 독특한 상황을 보여준다. 그들은 무예를 익혀야 했지만, 실전에서 그 실력을 증명할 기회는 극히 제한적이었다. 궁중 행사에서 활을 쏘고 말을 타는 것과, 전장에서 목숨을 걸고 적과 맞서는 것은 완전히 다른 차원의 문제이기 때문이다.
정음1446 ⓒHaan+
임영대군, 국방과 외교에도 참여하다
임영대군은 단순한 무예 시연 참가자를 넘어, 국방 및 외교 분야에서도 중요한 역할을 수행했다. 세종(世宗) 치세에는 1447년(세종 29) 영응대군과 함께 북방 종성과 온성의 경재소(京在所)를 나누어 관리하도록 하였는데 , 이는 전략적 요충지인 북방 지역의 군사 행정을 간접적으로 감독하는 역할을 맡았음을 보여준다. 또한 1445년에는 총통 제작을, 1450년에는 화차 제작을 감독하는 등 국방 기술 현안을 파악하고 관리하는 책임을 부여받았다.
이후 세조(世祖) 시대에는 종친의 실세로서 세조의 신임을 받았으며 , 외국에서 사신이 오면 접대하는 일을 맡기도 하였다. 이처럼 그는 군사 기술 관리와 외교적 역할을 보여주는 자리에 참여하여 왕실의 위엄을 세웠다.
임영대군, 상당한 실력을 가진 왕족 무인
임영대군은 ‘무예 훈련에 능숙하고 실전 연습에 열정적이었던 왕족’이었다고 평가해야 한다. 실록은 그의 참여와 일부 성과를 전할 뿐, 그가 당대 최고 무인이었는지를 판단할 만한 충분한 상대적 우열 정보나 절대적 수준을 판단할 수 있는 기록을 제공하지 않는다.
남겨진 기록의 행간을 읽어보며 과거를 엿보지만, 그 전모를 완벽히 재구성할 수는 없다. 임영대군의 진짜 무예 실력도 마찬가지이다. 더 많은 사료가 발견되기 전까지는, ‘상당한 무예 실력을 가진 왕족"이라는 평가에 만족해야 할 듯하다.
정성현 / Jeong Seonghyeon
한글닷컴(Haangle.com) 인문미디어연구소장, 세종국어문화원 인문학연구소장
김슬옹
한글닷컴(Haangle.com) 한글연구소장/편집위원, 세종국어문화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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