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age Nav

에디터정보

Haangle Latest

latest

영화 '정음1446' 뒷이야기 4 - 세종의 비밀 연구실은 광평대군 집이었을까?

정음1446 ⓒHaan+ 훈민정음 창제의 숨겨진 공간을 찾아서 한양의 밤거리를 가로지르는 다섯 마리의 말발굽 소리. 영화 <정음 1446년> 에서는 세종이 가장 신뢰하는 동궁(문종), 정의공주, 그리고 광평대군의 집에서 ...

정음1446 ⓒHaan+

훈민정음 창제의 숨겨진 공간을 찾아서

한양의 밤거리를 가로지르는 다섯 마리의 말발굽 소리. 영화 <정음 1446년> 에서는 세종이 가장 신뢰하는 동궁(문종), 정의공주, 그리고 광평대군의 집에서 '백성을 위한 우리 글자'를 만들기 위해 극비 모임을 진행하는 장면으로 시작한다.

이 극적인 영화적 상상 속에서, 우리는 하나의 질문을 던지게 된다. 세종은 도대체 '어디서', ‘그토록 비밀리에’ 훈민정음을 연구했을까?

《세종실록》에는 1434년 《삼강행실도》 제작 이후부터 1443년 창제 발표까지 무려 9년간 새 문자 관련 기록이 완전히 사라진다. 이는 철저한 비밀 연구였다는 강력한 증거이다. 그렇다면 세종이 수많은 사대부의 눈을 피해 이 위대한 문자를 완성한 '비밀 공간'은 과연 광평대군의 집이었을까?

경복궁, 피할 수 없는 감시의 눈

먼저 세종의 공식 거처인 경복궁 내부는 비밀 연구실이 될 수 없었을 가능성이 크다. 궁궐은 수많은 내관, 나인, 신하들이 오가며, 임금의 일거수 일투족을 사관들이 기록하는 공개된 장소이다.

책상 위에 'ㄴ'을 어떻게 만들지 고민하며 곡선을 수없이 그려낸 종이 조각 하나라도 있었다면, 이는 즉시 소문이 퍼져나가 반대파에게 결정적인 공격의 빌미를 제공했을 것이다. 1443년 창제 발표 당시 최만리를 비롯한 집현전 학자들이 "전혀 몰랐다"는 반응을 보인 것만 보아도, 세종이 얼마나 철저히 비밀리에 연구했는지 알 수 있다.

정음1446 ⓒHaan+

믿음직스러운 조력자

그렇다면 바로 광평대군(廣平大君) 이여(李璵)의 집이 세종의 비밀 연구실이었을 가능성이 크다. 광평대군의 집이 비밀 장소였을 이유는 다음과 같다.

광평대군은 세종의 아들들 중에서도 "성품이 총명하고 학문을 좋아하여 경서와 역사에 통달했다"는 평가를 받았다. 훈민정음 창제에 필요한 방대한 지식을 이해하고 보조할 수 있는 가장 믿음직한 인물이었다.

훈민정음 창제에는 음운학, 문자학, 철학 등 방대한 지식이 필요했다. 학문을 좋아하던 광평대군이 아버지의 연구를 보조했을 가능성이 높다. 특히 주목할 점은, 훈민정음 창제 후 《용비어천가》 편찬(1445-1447)에 광평대군이 깊이 관여했다는 사실이다. 《용비어천가》는 훈민정음으로 쓴 최초의 작품 중 하나인데, 광평대군이 이 작업에 참여했다는 것은 그가 훈민정음에 대해 깊이 이해하고 있었음을 시사한다.

문종은 세자로서 너무 주목받았고, 수양대군(후의 세조)은 야심이 커서 비밀 유지에 적합하지 않을 수 있다. 반면 광평대군은 조용히 학문에 매진하는 성격으로, 아버지의 큰 뜻을 이해하고 지지하며 비밀을 완벽하게 지켜낼 수 있는 든든한 조력자였을 가능성이 크다.

최적의 장소

조선시대 왕자들은 성년이 되면 궁궐 밖 '왕자군 저택'을 받았다. 이 사적 공간은 궁궐과 달리 사관이나 내관의 감시가 느슨했으며, 세종이 수시로 방문해도 "아들 집에 방문(거둥)한 아버지"로 위장할 수 있는 적절한 장소였다.

실제로 《세종실록》에는 세종이 "임금이 광평대군 집에 거둥했다"는 식의 방문 기록이 등장한다. 이런 기록들이 단순한 가족 방문이었을까, 아니면 비밀 연구를 위한 것이었을까?

1444년, 갑작스러운 죽음

광평대군은 훈민정음 창제 발표(1443년 12월) 직후, 그리고 최만리 등의 반대 상소(1444년 2월) 직후인 1444년, 겨우 20세의 젊은 나이로 갑작스럽게 세상을 떠난다.

《세종실록》에서는 그의 죽음을 "병으로 졸(卒)했다"고만 간단히 기록한다. 광평대군이 죽은 후, 세종은 3일간 조회를 정지할 정도로 남다른 슬픔을 보였다. 이는 단순히 아들을 잃은 슬픔이었을까? 아니면 영화 속 시나리오처럼 훈민정음 창제에 적극 도움을 준 아들이자 동지를 잃은 슬픔은 아니었을까?

정음1446 ⓒHaan+

역사의 빈 공간을 채우는 상상력

광평대군의 집이 세종의 비밀 연구실이었다는 직접적인 증거는 현재 남아있지 않다. 그러나 우리가 추론할 수 있는 정황과 맥락은 충분하다.

광평대군이 훈민정음으로 쓴 최초의 작품인 《용비어천가》 편찬에 깊이 관여한 사실, 그리고 그의 갑작스러운 죽음과 세종의 깊은 슬픔은 많은 것을 시사한다. 이는 단순한 부자 관계를 넘어, 새로운 문자 창제라는 위대한 비밀을 공유하며 함께 했기에 더욱 애통했던 것은 아니었을까?

역사 영화의 진정한 묘미는 바로 이 '역사의 빈 공간'’을 추론하며 상상력으로 채워 넣는 데 있다. 시나리오처럼 광평대군과 정의공주가 "ㄴ"에 획을 더해 "ㄷ, ㅌ"를 만드는 아버지의 과학적 원리를 감탄하며 경청하고, "이렇게 하면 적은 수의 기본 글자로 모든 소리를 나타낼 수 있겠습니다!"라며 학문적 성과를 함께 나누며 기뻐하는 모습이 떠오른다.

확실한 것은 세종이 ‘백성들이 쉽게 익힐 수 있도록’ 글자를 만들고자 했으며, 이를 위해 의심을 사지 않고 안전하며, 신뢰할 만한 조력자가 있는 장소를 절실히 필요로 했다는 점이다.

영화의 한 장면처럼 세종이 "오래 기다렸느냐. 너희들이 함께 하니 기쁘구나"라고 말하며 비밀 연구를 편안하게 할 수 있는 공간, 바로 그 절대적인 신뢰가 중요했다.

광평대군의 집은 이 모든 조건을 충족하는, 가장 그럴듯하고 극적인 비밀 연구실의 후보지이다. 580년 전의 비밀은 아직 어둠 속에 묻혀 있지만, 세종과 광평대군, 이 부자가 함께 만들어낸 위대한 문자의 숨겨진 이야기는 오늘날까지도 우리에게 큰 울림을 준다.



정성현

정성현 / Jeong Seonghyeon

한글닷컴(Haangle.com) 인문미디어연구소장, 세종국어문화원 인문학연구소장

김슬옹

김슬옹

한글닷컴(Haangle.com) 한글연구소장/편집위원, 세종국어문화원장



댓글 없음

Latest Articles

LANGUAGE

한글닷컴(Haangle) 풍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