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음1446 ⓒHaan+ 세종의 놀라운 융합 프로젝트 필자들이 《훈민정음 해례본》 해례본을 처음 읽었을 때의 충격을 아직도 잊을 수 없다. 단순한 문자 해설서가 아니었다. 그것은 과학 교과서이면서 철학서였고, 동시에 최고의 예술 작품이었...
정음1446 ⓒHaan+
세종의 놀라운 융합 프로젝트
필자들이 《훈민정음 해례본》 해례본을 처음 읽었을 때의 충격을 아직도 잊을 수 없다. 단순한 문자 해설서가 아니었다. 그것은 과학 교과서이면서 철학서였고, 동시에 최고의 예술 작품이었다. 그리고 그 모든 원리의 중심에는 '사람'을 향하고 있었다.
세종은 이처럼 완벽한 문자를 어떻게 만들 수 있었을까? 답은 간단하다. 세종은 애초에 과학만, 철학만, 예술만으로 접근하지 않았다. 모든 것을 하나로 융합했다. 그 놀라운 융합의 비밀을 하나씩 풀어보자.
1. 과학 - 혀를 관찰하라
훈민정음 창제 원리의 첫 번째 축은 정밀한 소리 과학이다.
"ㄱ은 혀뿌리가 목구멍을 막는 모양이다(ㄱ 牙音 如君字初發聲 並書如蚨字初發聲)"
이 문장은 세종이 직접 음성 기관을 관찰하고 소리 나는 모양을 형상화했음을 의미하는 것이 아닌가? 'ㄱ'을 발음할 때 정말로 혀뿌리가 목구멍을 막는다.
실제 자음의 기본자들은 다음과 같이 발음 기관의 모양을 본뜬 것이었다.
더 놀라운 건 다음이다:
- ㄴ: 혀끝이 윗잇몸에 닿는 모양
- ㅁ: 입술 모양(앙다문 모습)
- ㅅ: 이 모양
- ㅇ: 목구멍 모양
이 것이 끝이 아니다. 세종은 소리의 세기까지 고려했다:
- ㄱ → ㅋ (획 하나 추가로 거센소리)
- ㄷ → ㅌ
- ㅂ → ㅍ
MRI, X-ray 등 현대 음성학의 지식도구 없이 오직 관찰과 추론만으로 이토록 정확한 소리 분석을 해냈다는 사실은 경이롭다.
2. 철학 - 28이라는 신비한 숫자
훈민정음 창제의 두 번째 축은 우주적 질서를 담은 철학이다.
훈민정음 기본자 28자, 훈민정음 해례본 제자해 쪽 수 28쪽. 그런데 왜 하필 28자일까? 이 숫자는 우연이 아니었다.
천문학적 의미: 동양 천문학의 28수(宿). 하늘을 28개 구역으로 나눈 별자리 체계다. 세종은 천문학자였다. 그에게 28은 '우주의 완전함'을 의미했다.
불교적 의미: 28은 불교에서도 특별하다. 욕계 6천, 색계 18천, 무색계 4천을 합하면 28천. 우주 전체를 아우르는 숫자다.
음양오행의 조화: 해례본을 보면 자음을 오행(五行)으로, 모음을 음양(陰陽)으로 설명한다.
- 어금닛소리(ㄱ) = 목(木)
- 혓소리(ㄴ) = 화(火)
- 입술소리(ㅁ) = 토(土)
- 잇소리(ㅅ) = 금(金)
- 목소리(ㅇ) = 수(水)
오행의 배열은 목→화→토→금→수라는 상생(相生, 서로 낳아줌)의 순환 구조이다. 세종은 문자에 우주의 생성과 순환 원리를 담아 보편적인 권위를 부여하려 했던 것이다.
3. 예술 - 하늘, 땅, 사람의 기하학
세 번째 축은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조형 예술이다. 한글이 시각적으로 안정적이고 아름다운 이유는 '기하학적 완벽성'에 있다.
한글 디자이너들에게 늘 듣는 말이 있다. "한글은 그 자체로 예술이에요." 왜일까? 바로 이러한 ‘기하학적 완벽성’때문이다.
모음의 기본자는 점, 선, 원의 조합으로 이루어진다.
- ㆍ (점): 하늘 (천)
- ㅡ (수평선): 땅 (지)
- ㅣ (수직선): 사람 (인)
이 세 기본 요소만으로 모든 모음을 만들어내는 것은 천·지·인(天地人) 사상과 연결되는 과학이자 철학, 그리고 동시에 미술이다.
황금비율의 발견: 훈민정음 28자를 분석해보니, 80여 %가 직선이고 직선은 거의 5:5 황금비율에 가깝다. 우연일까? 아니면 세종이 의도한 것일까?
대칭과 균형: 'ㅁ'을 보라. 완벽한 정사각형. 'ㅇ'을 보라. 완벽한 원. 'ㅡ'와 'ㅣ'의 직교. 이런 기하학적 순수함은 글자에 높은 시각적 안정감을 부여한다.
4. 그런데 진짜는 '사람다움'이었다
세종은 훈민정음을 만드는데 과학과 철학, 예술을 모두 동원했다. 그 이유가 무엇이었을까? 해례본 서문에 명확히 드러난다.
"나랏말싸미 듕귁에 달아... 내 이를 어엿비 너겨..."
어엿비 너겨. 불쌍히 여겨. 즉 백성을 위한 마음이 핵심이었다. 세종에게 이 모든 융합은 목적을 위한 수단일 뿐이었다.
세종에게 과학은 수단이었다:
- 가장 쉽게 배울 수 있도록 → 음성기관 모양을 본뜸
- 가장 체계적으로 익히도록 → 직선 중심의 도형과 가획의 원리 도입
- 가장 효율적으로 쓰도록 → 모아쓰기 방식 채택
철학도 수단이었다:
- 양반들 설득 전략에 도움 → 음양오행
- 보편성 가치 부여 → 천문학적 완전수 28 채택
- 권위 부여 → 보편 과학과 보편 철학 그 자체
예술도 수단이었다:
- 아름다워야 사랑받는다 → 기하학적 조형미
- 균형 잡혀야 읽기 쉽다 → 시각적 안정감
- 품격이 있어야 인정받는다 → 정교한 판각 예술
정음1446 ⓒHaan+
5. 융합의 정점 - 'ㅇ'이라는 걸작
필자들이 가장 좋아하는 글자는 'ㅇ'이다. 왜?
과학적으로: 목구멍이 열린 모양. 실제로 'ㅇ'을 발음하면 목구멍이 동그랗게 열린다.
철학적으로: 하늘의 둥근 모양. 무극(無極)이자 태극(太極). 비어있으면서(ㅇ) 가득 찬(ㆁ) 이중성.
예술적으로: 완벽한 원. 시작도 끝도 없는 영원의 상징.
인간적으로: 가장 쉬운 소리. 아기가 처음 내는 소리 "아, 오"에 들어있는 그 'ㅇ'.
하나의 글자에 이 모든 것이 담겨있다. 이게 바로 세종의 천재성이다.
6. 실용이 곧 최고의 인문학
그런데 필자들이 강조하고 싶은 것이 있다. 세종의 출발점은 '실용'이었다는 것.
"백성이 말하고자 하는 바가 있어도..." - 이게 시작이었다. 소통의 문제. 지극히 실용적인 문제.
하지만 세종은 여기서 멈추지 않았다.
실용(쉬운 문자) → 과학(음성 관찰) → 체계(제자 원리) → 철학(음양오행) → 예술(조형미) → 인간 존엄(모든 백성의 문자)
실용에서 시작해 인간 존엄에 도달한 것이다. 이것이야말로 진정한 인문학이 아닌가?
7. 580년 전, 세종이 우리에게 묻는다
세종이 21세기에 살았다면 무엇을 만들었을까 상상해본다. 아마도 인공지능(AI)을 만들었을 것이다. 하지만 그의 인공지능은 달랐을 것이다. 가장 과학적이면서도, 가장 철학적이고, 가장 예술적이면서도, 궁극적으로 가장 인간적인 그런 인공지능을 만들지 않았을까? .훈민정음이 그랬듯이 말이다.
오늘 우리는 묻는다. 과학인가, 철학인가, 예술인가? 세종은 580년 전에 이미 답했다. "모두가 다이며 그 중심에는 사람이 있다."
30년간 훈민정음을 연구하며 깨달은 진실이 바로 여기에 있다. 진짜 혁신은 융합에서 나온다는 것이다. 그리고 진짜 융합은 사람을 향할 때 완성된다는 것.
훈민정음은 그 생생한 증거이다. 과학이자 철학이자 예술인, 그러나 무엇보다 '사람을 위한' 문자.
이것이 바로 세종이 시대를 넘어 우리에게 남긴 최고의 유산이다.
정성현 / Jeong Seonghyeon
한글닷컴(Haangle.com) 인문미디어연구소장, 세종국어문화원 인문학연구소장
김슬옹
한글닷컴(Haangle.com) 한글연구소장/편집위원, 세종국어문화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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