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음1446 ⓒHaan+ 1444년 초봄, 집현전 찬반 전쟁 <정음 1446년>의 한 장면. 훈민정음 찬성파와 반대파가 사정전에서 날 선 논쟁을 벌이고 있다. 왕을 중심으로 좌우에 나뉘어 앉은 학사들. 최만리는 "성현...
정음1446 ⓒHaan+
1444년 초봄, 집현전 찬반 전쟁
<정음 1446년>의 한 장면. 훈민정음 찬성파와 반대파가 사정전에서 날 선 논쟁을 벌이고 있다. 왕을 중심으로 좌우에 나뉘어 앉은 학사들. 최만리는 "성현의 글을 알지 못하면 사리를 어찌 밝히겠나이까!" 외치고, 신숙주는 "백성이 억울함을 풀 수 있을 것"이라며 맞선다.
과연 훈민정음 창제 직후 집현전 학사들은 정확히 7 대 7로 갈라져 대립했을까? 실제 실록을 살펴보면 이 구도는 영화적 상상이 아니라 놀랍도록 정확한 수의 대립이었다는 사실이 드러난다. 아니, 엄밀히 말하면 집현전 학사 7인 대 7인, 그리고 돈녕부주부 1인이 찬성파에 가세한 구도였다. 8 대 7. 이 아슬아슬한 한 사람의 차이가 우리 민족의 문자를 지켜냈다.
이제 1444년 초봄, 집현전 내부에서 벌어졌던 '찬반 전쟁'의 숨겨진 숫자의 비밀과 세종의 탁월한 인사 전략을 알아보자.
7 대 7, 그리고 변수
세종대왕이 훈민정음 창제를 발표한 1443년 12월, 그날의 구체적인 모습은 《세종실록》에 직접적으로 기록되지 않았다. 실록에는 ‘이달에 임금께서 친히 언문 스물여덟 자를 만들었다’는 사관의 극히 간략하고 담담한 문장만 남아 있을 뿐이다.
그러나 ‘임금께서 새 문자를 만드셨다’는 소식은 당시 집현전 학자들에게 엄청난 충격을 주었을 것으로 예측할 수 있다.
"뭐라고? 임금께서 새 문자를 만드셨다고?", "우리도 몰랐단 말인가?"….
실록의 간략한 기록은 오히려 당시 지배층의 당혹감이나 싸늘한 분위기를 역설적으로 반영한다.
먼저 찬성파를 보자. 《훈민정음》 해례본에 이름을 올린 8인이다.
- 집현전 학사 7인: 정인지, 최항, 박팽년, 신숙주, 성삼문, 이개, 이선로
- 돈녕부주부 1인: 강희안
반대파 7인: 최만리, 신석조, 김문, 정창손, 하위지, 송처검, 조근
7 대 7. 완벽한 균형. 이 숫자는 당시 집현전의 지식 권력이 얼마나 팽팽하게 양분되었는지를 극적으로 보여준다.
1444년 2월 16일, 세종은 집현전에 중국 운서 《운회》를 훈민정음으로 번역하라는 명령을 내린다. 영화 속 장면처럼, 세종은 최항, 박팽년, 신숙주, 이선로, 이개, 강희안 등 핵심 인물에게 맡겼다.
그런데 이 시점이 정말 절묘했다. 세종이 본격적인 훈민정음 사업의 시동을 걸자마자(2월 16일), 불과 4일 후인 2월 20일, 최만리 일파가 반격의 상소를 올렸다.
흔히 반대파는 나이든 보수파였을 것이라고 생각하기 쉽다. 그러나 양쪽 모두 20-40대의 젊은 학자들이었다. 반대파의 막내급인 조근(27세)과 찬성파의 막내급인 성삼문(26세)이 각각 반대파와 찬성파에 속했다는 것이 흥미롭다. 이는 훈민정음 반포에 대한 찬반이 나이나 보수 대 진보 관점이 아니라, 시대에 대한 깊은 학문적 성찰과 신념의 문제였음을 시사한다.
강희안, 운명의 한 수
강희안은 이 아슬아슬한 대결에서 역사를 바꾼 한 사람이었다. 그는 집현전 학사가 아니라 왕실 가족을 관리하는 돈녕부주부였다.
세종이 그를 끌어들인 이유는 명확하다. 세종은 집현전 내부의 강력한 반대를 예상했기에, 학문과 서화에 뛰어난 외부 인력이 필요했다. 강희안이 가세함으로써 찬성파는 8인이 되었다. 7대 7의 팽팽한 대립에서 8대 7로 기울어진 것이다.
이후 반대 상소에 대한 세종의 처벌도 차등적이었다. 정창손에게는 "아무짝에도 쓸데없는 용렬한 선비"라며 가장 강경하게 파직을 명했지만, 나머지 5인에게는 하루만 옥에 가두는 경미한 처벌을 내렸다. 실제로 하위지는 나중에 《동국정운》 편찬에 참여한다. 반면 찬성파에게는 즉시 《운회》 번역 작업을 지시했으며 이들에게는 후한 상이 하사되었다. 그리고 《훈민정음 해례본》 집필의 명예가 주어졌다. 이는 당근과 채찍을 활용한 탁월한 인사 전략이라고 볼 수 있다.
정음1446 ⓒHaan+
역사적 결단
집현전 학사 7인이 세종의 훈민정음 사업을 지지했다는 것은 기적에 가까운 선택이었다. 이들이 감수해야 했던 위험은 결코 가볍지 않았다.
첫째, 신분적 위험이 따랐다. 한문 독점권을 포기하는 것은 곧 수백 년간 이어져 온 양반 지배층의 기득권을 스스로 포기하는 것을 의미했다. 이는 그들뿐만 아니라 그들의 가문과 자손의 사회적 지위까지 위협하는 중대한 사안이었다.
둘째, 학문적 모험이었다. 당시 새 문자가 성공적으로 정착할지 아무도 예측할 수 없었으며, 만약 실패한다면 이들은 임금의 오판을 도운 역사의 죄인으로 낙인찍힐 위험이 있었다.
셋째, 동료와의 결별이었다. 그들은 같은 공간에서 동고동락한 집현전 동료 7인과 결별하고 맞서야 하는 인간적인 고뇌를 감당해야 했다.
이 모든 위험에도 불구하고 정인지, 최항, 박팽년, 신숙주, 성삼문, 이개, 이선로 등 7인의 학사와 강희안을 포함한 이 8인은 세종의 편에 섰다. 그들의 선택은 단순한 개인의 출세나 신념을 넘어, 우리 민족의 문자가 세계사에 살아남는 운명을 결정한 역사적 결단이었다.
세종이 이룬 진정한 승리
1446년 《훈민정음》 해례본이 완성된 후, 반대파의 반응은 놀라웠다. 더 이상의 공개적인 반대는 없었다. 오히려 하위지의 예처럼, 반대파 중 일부는 훈민정음 관련 사업에 참여했다.
세종대왕은 반대파를 힘으로 누른 것이 아니라 완벽한 논리로 설득했다. 7대 7의 팽팽한 대립을 14인 전체의 동의와 참여로 전환 시킨 것, 이것이야말로 세종이 이룬 진정한 승리이자 지도력의 정수라고 할 수 있다.
집현전 학사 7인 대 7인의 대립. 그리고 돈녕부주부 1인의 가세. 이 8대 7의 기적이 오늘날의 한글을 만들었다.
역사는 때로 이처럼 아슬아슬한 순간들로 이루어져 있다. 그리고 그 순간, 기득권의 안정 대신 미래를 선택하는 용기 있는 소수가 세상을 바꾼다. 정인지, 최항, 박팽년, 신숙주, 성삼문, 이개, 이선로, 강희안.이 8인의 이름을 우리가 기억해야 하는 이유다.
정성현 / Jeong Seonghyeon
한글닷컴(Haangle.com) 인문미디어연구소장, 세종국어문화원 인문학연구소장
김슬옹
한글닷컴(Haangle.com) 한글연구소장/편집위원, 세종국어문화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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