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음1446 ⓒHaan+ 훈민정음 반대 상소가 남긴 뜻밖의 선물 보통 '최만리' 하면 세종대왕의 위대한 업적을 가로막은 고집불통 보수파, 백성을 외면한 냉혈한 사대부의 이미지를 떠올린다. 교과서와 드라마가 우리에게 각인시킨 ...
정음1446 ⓒHaan+
훈민정음 반대 상소가 남긴 뜻밖의 선물
보통 '최만리' 하면 세종대왕의 위대한 업적을 가로막은 고집불통 보수파, 백성을 외면한 냉혈한 사대부의 이미지를 떠올린다. 교과서와 드라마가 우리에게 각인시킨 역사의 악역 이미지이다. 그러나 역사를 냉정하게 들여다보면 우리는 예기치 못한 진실을 마주하게 된다. 최만리의 격렬한 반대가 없었다면, 우리는 오늘날 훈민정음 창제의 핵심 원리가 담긴 《훈민정음》 해례본을 영원히 갖지 못했을지도 모른다.
그의 반대는 단순한 개인의 고집이나 왕권에 대한 반항이 아니었다. 그것은 15세기 조선의 지식 권력과 국제 질서를 관통하는 피할 수 없는 시대의 논리였다. 그리고 역설적이게도, 그 반대는 세종의 위대한 발명을 논리적으로, 학술적으로 더욱 완벽하게 담금질해준 역사적 '디딤돌'이 되었다. 이제 그 반대 상소에 숨겨진 진실을 파헤쳐보자.
1444년 2월 20일, 그날의 진실
1444년 2월 20일, 집현전 부제학 최만리가 여섯 명의 동료와 함께 세종 앞에 나아간다. 신석조, 김문, 정창손, 하위지, 송처검, 조근. 이들이 올린 것이 바로 그 유명한 '언문 반대 상소'다.
상소문은 의외의 문장으로 시작된다. "신 등이 엎드려 보건대, 언문을 만든 것이 매우 신기하고 기묘하여, 지혜를 나타냄이 저 멀리 아득한 옛것으로부터 나온 것을 알겠습니다."
반대 상소가 칭찬으로 시작되다니! 이들은 훈민정음의 과학성과 우수성 자체는 인정했다. 문제는 반포였다. 왜 그들은 훈민정음 반포를 목숨을 걸고 반대했을까?
훈민정음 반대 상소의 3가지 근거
최만리 일파가 훈민정음 반포를 반대한 이유는 크게 세 가지였다.
첫째, 외교적 위협과 사대주의 문제이다. 이들은 "중국을 섬기는 나라가 독자적인 새 문자를 만드는 것은 오랑캐나 하는 일"이라는 논리를 내세웠다. 당시 명나라 중심의 동아시아 국제 질서 속에서, 조선의 독자적 문자 창제는 외교적 위기를 초래하거나 심지어 명나라가 반역으로 간주할 수 있는 매우 위험한 사안이었다.
둘째, 지식 독점의 붕괴에 대한 우려이다. 조선의 양반들에게 한자와 한문은 신분 특권의 실질적인 기호이자 지식을 독점하는 수단이었다. “성리학은 한문으로만 제대로 할 수 있다”는 신념은 곧, 누구나 쉽게 배울 수 있는 새로운 문자가 등장할 경우 자신들의 독점적 지위와 사회적 권위가 무너질 것을 우려하는 생존의 문제와 직결되어 있었다.
셋째, 현실 인식의 차이이다. 그들은 "억울한 죄인이 생기는 것은 관리가 공평하지 못한 탓이지, 문자를 몰라서가 아니다"라고 주장했다. 이 주장은 나름의 합리적 근거처럼 보일 수 있으나, 이는 백성의 고통을 외면하고 모든 문제를 개인의 탓으로 돌리려는 지배층의 전형적인 한계를 드러낸다.
정음1446 ⓒHaan+
세종의 분노, 그리고 예상치 못한 선물
상소문을 받은 세종의 분노는 대단했다. 웬만하면 벌하지 않던 그가, 특히 정창손에게는 "이따위 말이 어찌 선비의 이치를 아는 말이겠느냐. 아무짝에도 쓸데없는 용렬한 선비로다!"라고 호되게 꾸짖었다.
결국 정창손은 파직당했고, 김문은 심한 옥고를 치렀으며, 나머지는 하루 동안 갇혔다가 풀려났다. 그런데 이 격렬한 반대 상소가 결과적으로 훈민정음 보급에 큰 도움이 되었다는 점이다.
첫째, 해례본 집필의 결정적 계기가 되었다. 세종은 원래 자신이 만든 '정음편'만으로 반포하려 했던 것으로 추정된다. 하지만 반대파의 논리에 부딪히자, 문자 창제의 원리와 학술적 근거를 더욱 상세히 담은 해설서가 필요함을 절감했다. 이것이 정인지 등 8인의 학자를 동원해 《훈민정음》 해례본을 만들게 된 결정적 계기가 되었다.
둘째, 역사적 기록을 완벽하게 보존할 수 있었다. 상소를 둘러싼 논쟁 과정이 《세종실록》에 고스란히 기록되었다. 덕분에 우리는 세종의 훈민정음 창제 동기를 명확히 알 수 있게 되었다. "사형 집행 판결문을 언문으로 쓰면 어리석은 백성도 억울함을 당하지 않을 것이다.“ 등의 말들이 모두 이 논쟁 과정에서 나왔다.
셋째, 세계 최고의 문자 해설서가 탄생했다. 반대파를 논리적으로 설득하기 위해 해례본은 더욱 정교하고 체계적으로 다듬어졌다. 음성학, 문자학, 철학이 융합된 세계 최고의 문자 해설서가 바로 이 정치적 갈등 속에서 탄생했다.
최만리를 위한 변명
세종이 병 치료차 청주 초정 약수터에 행차하면서도 훈민정음 연구를 멈추지 않자, 반대파는 불만을 토로했다.
"전하께서 청주 약수터로 행차하시는데… 언문 같은 것은 꼭 제 기한 안에 시급하게 마쳐야 할 일도 아니온데, 어찌 임시 처소에서 서둘러 만드시나이까?"
이 얼마나 놀라운 열정인가! 의정부에 국정을 맡기면서까지 훈민정음 반포를 서두른 세종의 모습을 생생하게 보여주고 있다.
최만리는 당대 최고의 학자였고 청백리였다. 그는 다만 자신이 몸담고 있는 시대의 한계를 벗어나지 못했을 뿐이다. 18~19세기 실학자들조차 한글 사용을 주저했던 역사를 돌이켜볼 때, 15세기 창제 직후에 훈민정음 반포를 반대했다고 그를 비난할 수 있을까?
오히려 최만리는 정직했다. 훈민정음의 우수성을 인정하면서도, 자신이 믿는 가치와 신념을위해 목숨을 걸고 반대했다. 그리고 그의 반대가 있었기에, 우리는 더 완벽한 《훈민정음》 해례본을 갖게 되었다.
토론이 만든 기적
역사는 때로 역설적이다. 반대가 오히려 발전의 계기가 되고, 걸림돌이 디딤돌이 되기도 한다. 최만리의 반대 상소가 없었다면, 훈민정음은 간략한 설명서만 남긴 채 역사 속에서 흐릿하게 사라졌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들의 반대가 있었기에 세종은 더 치밀하게 준비했다. 집현전 젊은 학자들을 동원해 완벽한 해설서를 만들었고, 그것이 오늘날까지 전해져 세계기록유산이 되었다.
오늘날에도 우리는 종종 '최만리'가 되곤 한다. 새로운 변화 앞에서 기득권을 지키려 하고, 익숙한 것을 놓지 못하는 것은 인간의 자연스러운 모습이다. 디지털 시대와 인공지능(AI) 시대를 맞아, 우리 역시 누군가의 혁신에 반대하는 '최만리'가 되고 있는 것은 아닌지 되돌아보게 된다. 하지만 이 역시 괜찮다. 역사가 가르쳐주듯, 정직한 반대는 때로 더 나은 결과를 낳는 디딤돌이 된다. 중요한 것은 세종처럼 미래에 대한 비전을 가진 사람과, 최만리처럼 자신의 신념을 가진 사람이 함께 토론하고 경쟁하는 것이다.
그 과정에서 위대한 문화유산이 탄생한다. 《훈민정음》 해례본처럼.
정성현 / Jeong Seonghyeon
한글닷컴(Haangle.com) 인문미디어연구소장, 세종국어문화원 인문학연구소장
김슬옹
한글닷컴(Haangle.com) 한글연구소장/편집위원, 세종국어문화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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