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음1446 ⓒHaan+ 북한산 깊은 곳, 해례본을 품은 절터 1444년 2월, 훈민정음 반포 찬성파와 반대파로 집현전이 분열되던 긴장된 시기, 세종대왕은 어디에서 《훈민정음》 해례본을 준비했을까? 반대파의 눈을 피해 안전하게 작업할 수...
정음1446 ⓒHaan+
북한산 깊은 곳, 해례본을 품은 절터
1444년 2월, 훈민정음 반포 찬성파와 반대파로 집현전이 분열되던 긴장된 시기, 세종대왕은 어디에서 《훈민정음》 해례본을 준비했을까? 반대파의 눈을 피해 안전하게 작업할 수 있는 곳은 어디였을까?
진관사와 사가독서
진관사는 단순한 절이 아니었다. 세종이 만든 ‘인재 양성소’였다. 1442년, 세종은 젊은 수재 6명을 이곳으로 보낸다. 사가독서(賜暇讀書). 말 그대로 '휴가를 주어 책을 읽게 한다'는 뜻이다. 하지만 이건 평범한 독서 휴가가 아니라 특별 훈련이었다.
- 박팽년(25세)
- 신숙주(25세)
- 성삼문(24세)
- 이개(25세)
- 이석형(27세)
- 하위지(30세)
이들 6명 중 4명(박팽년, 신숙주, 성삼문, 이개)은 훗날 해례본의 공저자가 되었고 1명(하위지)은 반대 상소에 참여한다. 나머지 1명(이석형)은 세자 언문 교육에 관여한다. 이는 우연이었을까? 그렇지는 않았을 것이다.
'대안 공간'의 필요성
1443년 12월 훈민정음 창제 발표 이후, 1444년 2월 20일 최만리 등의 격렬한 반대 상소로 집현전은 찬반으로 양분된다. 이 상황에서 집현전 수정전(修政殿)에서 해례본을 편찬할 수 있었을까? 불가능했을 것이다. 따라서 세종에게는 반대파의 눈길이 미치지 않는 '대안 공간'이 필요했을 것이다.
진관사가 유력한 후보지로 거론되는 이유는 다음과 같다.
첫째, 은밀성이다. 진관사는 북한산 깊은 곳에 자리하여 외부인의 접근이 어려웠다. 또한 사찰이라는 특성상 누가 드나들더라도 '불공'이나 '수행'을 명분으로 내세워 외부 활동을 숨기기에 용이했다.
둘째, 지리적 조건이 적절했다. 진관사는 경복궁에서 임금이 비밀리에 오가며 작업 상황을 직접 지휘하기에 적절한 거리에 있었다. 이는 임금의 잦은 행차가 지나친 의혹을 사지 않으면서도, 작업의 기밀성과 신속성을 유지할 수 있는 최적의 지리적 조건이었다.
셋째, 인맥과 기반이 갖추어져 있었다. 진관사는 이미 사가독서 장소로 활용되었기에 연구 기반이 갖추어져 있었으며, 해례본 공저자 4인이 이곳을 '익숙하고 믿을 수 있는 터전'으로 삼아 신뢰 기반의 공동 작업을 수행할 수 있었다.
정음1446 ⓒHaan+
신미 스님의 역할
진관사에는 또 한 명의 중요한 인물이 있었다. 신미는 세종의 총애를 받던 고승으로, 훈민정음 반포 후 《석보상절》, 《월인천강지곡》 등 훈민정음 불경 번역 사업에 깊이 관여했다.
신미 스님이 진관사에서 해례본 준비를 도왔을 가능성이 크다고 본다. 불교 경전 인쇄 기술은 당시 최고 수준이었다. 해례본의 정교한 판각도 스님들의 도움 없이는 어려웠을 것이다.
의도적인 누락?
1446년 9월, 《훈민정음》 해례본이 세상에 나왔으나, 이처럼 중요한 국가 기록물이 어디에서 인쇄되었는지에 대한 공식 기록이 전혀 없다는 점은 수수께끼로 남아있다. 보통 중요한 책은 '주자소(鑄字所)에서 인쇄함'처럼 인쇄 장소를 밝힌다. 그러나 해례본에 그런 기록이 없다. 이는 ‘의도적 누락’일 가능성이 높다. 진관사에서 비밀리에 작업을 했기에, 굳이 인쇄 장소를 밝힐 필요가 없었던 것은 아니었을까?
역사의 빈 면을 채우는 감동의 여정
580년이 지난 지금, 우리는 《훈민정음》 해례본이 어디서 어떻게 만들어졌는지 정확히 알 수 없다.
진관사설(說)이 사실이든 아니든, 한 가지는 분명하다. 세종대왕과 젊은 학자들이 온갖 정치적 반대와 위험을 무릅쓰고 해례본을 완성했다는 점이다. 어느 장소에서 만들었든지 그들의 열정과 노력은 변하지 않는다.
우리 문자의 핵심 원리를 담은 《훈민정음》 해례본이 어떻게 탄생했는지 역사의 숨겨진 여백을 상상해보는 것만으로도, 우리는 한글에 담긴 그들의 뜨거운 마음과 헌신을 생생하게 느낄 수 있을 것이다.
정성현 / Jeong Seonghyeon
한글닷컴(Haangle.com) 인문미디어연구소장, 세종국어문화원 인문학연구소장
김슬옹
한글닷컴(Haangle.com) 한글연구소장/편집위원, 세종국어문화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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